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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0. 2023

평화로운 도시, 제닌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3. 평화로운 도시, 제닌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가면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게 되고 곧이어 북부 지방의 중심 도시 중 하나인 제닌(Jenin)에 도착한다. 제닌에 들어서면 한국에서 상상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뉴스에서 보던 부서진 폐허와 무기를 든 사람들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대신 2~3층 정도의 저층 건물들이 약간 낡긴 했어도 온전한 모습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팔레스타인에서 보기 힘든 동양인을 발견하자 입가에 미소를 활짝 띠며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다. 어디에서도 테러나 분쟁 같은 느낌은 찾아볼 수 없고, 목가적인 평화로움만 가득하다.


멀리서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푸른 돔의 모스크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온다. 낯설지만 그 울림에서 전해지는 경건한 느낌이 듣는 사람의 기분을 맑게 해준다. 무슬림 사회답게 거리에는 술집이 보이질 않고 여성들은 대부분 긴 치마를 입고 히잡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다.


히잡은 검은색이나 흰색뿐만 아니라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 등 색깔이 다양하고, 저마다 다양한 무늬가 들어가 있어 개성을 드러낸다. 40대 이상의 여성들 중에는 원색의 천에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과거에는 옷의 무늬와 색깔이 마을별로 정해져 있어서 출신 마을을 상징했으나 오늘날에는 그런 의미는 사라지고 그냥 패션이 되었다. 한편, 남자들의 옷차림은 청바지나 후드 티, 정장 등으로 거의 모두가 서구화되어 있고 머리 스타일은 하나같이 짧은 스포츠형으로 통일되어 있다.


시내 번화가에 들어서자 슈퍼마켓과 옷가게, 휴대폰 가게 등의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쇼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인파의 물결은 도로마저 점거해 버려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다. 사람들로 둘러싸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차량들이 경적을 계속 울려대지만, 상인들의 호객 소리는 그보다 커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시 외곽지역에서 느꼈던 목가적인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도시의 활력이 흘러넘친다.     


사진. 제닌 시내의 모습. 전통적인 건물들 사이사이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눈길을 끈다.     


10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대기는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몸도 열기로 가득하고 홍수처럼 땀이 났다. 이 한여름에 잠시도 쉬지 않고 1시간 동안 걸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땀도 식히고 목도 축일 겸 음료수 가게에서 레모네이드를 한 잔 샀다. 레모네이드는 커피 다음으로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다. 한국에서보다 민트를 많이 넣어 만들기 때문에 상큼한 맛이 강하고, 갈증 해소에 좋다.


레모네이드를 받아 들자마자 한 모금 마시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가야 할 길이 멀어 잠시도 쉴 시간이 없다. 목표는 북부지역의 중심지인 나블루스(Nablus). 지금부터 4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체력이 좋은 첫날에 무리하려고 일부러 여정을 길게 잡았다. 아침을 먹고 출발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1.4. 도보 여행의 소소한 재미


시내에서 도시 남쪽으로 빠져나오기까지 겨우 30분이 걸렸다. 제닌이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래도 나름 중요한 도시라곤 하지만 인구가 5만 명에 불과하고 면적도 37㎢인 소도시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그동안 늘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실제 크기를 체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교외를 걸어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매번 차창 밖으로만 보던 풍경을 걸으면서 직접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도로의 양옆으로 나무들이 무성하게 심겨 있고 그 위에 펼쳐진 푸르른 하늘은 휴양지를 걷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사진. 제닌 교외


도보 여행은 오로지 주위 풍경만 보고 걷는 지루할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미난 일들이 있었다. 제닌을 빠져나오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낙타를 탄 베두인(bedouin, 아랍 유목민)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멀리서부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낙타의 등에는 무언지 모를 배낭이 한가득 실려 있었는데 아마 제닌으로 가져가 팔 물건인 듯싶다. 도로에는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있는데 낙타를 타고 터벅터벅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사진. 여행 중에 만난 베두인의 모습.


잠시 후에는 공사장 인부들과 만났다. 사람들이 걸어 다닐 리 없는 교외에서 동양인 여행자를 보게 되자 저마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주전자에서 커피를 따라 주었다. 놀랍게도 이 무더운 날씨에 그들이 건넨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아랍 커피였다. 잔을 잡자마자 열기가 확 올라왔다. 성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한 모금 마시니 몸 안이 화끈거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열치열의 풍습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여행을 위해 챙겨온, 오래된 지도는 또 다른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에서 구글 지도가 지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가장 상세한 지도를 찾아 스마트폰에 저장했는데 그게 무려 1992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최근에 만들어진 다른 지도들도 있었지만 작은 마을들까지 표시된 것은 이게 유일했다.[당시에는 몰랐으나 이스라엘 인권단체 베첼렘(B’Tselem)의 웹사이트(http://www.btselem.org/)에서 보다 상세한 최신 지도를 다운받을 수 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팔레스타인인데 고작 20년 동안 크게 바뀐 게 있겠냐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이 지도를 택했다. 그러나 20년의 간극은 컸다. 제닌 인근에 있는 카바티야(Qabatiya)는 20분이면 통과할 정도로 작은 마을로 그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제는 마을이 아니라 소도시가 된 것이다. 오래된 지도가 아니었더라면 알 수 없었던 세월의 흔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도를 보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일이 재밌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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