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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0. 2023

점령이 의미하는 것

이 글은 2013년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걸어서 종단한 여행기로,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및 2024년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으로 선정된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으며, 인터넷 게재글임을 감안해 일부 주석을 제외하였습니다.


(책 머리말 보러가기)


1. 상상 너머를 걷다.

1.1.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


한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면 기나긴 여정을 각오해야 한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야 하는 지리적 거리에다 팔레스타인에 공항이 없어서 인접국인 이스라엘이나 요르단, 이집트를 거쳐 육로로 들어가야 하는 물리적 제약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안보를 이유로 팔레스타인이 공항과 항구를 건설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현재 인천공항에서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까지 대한항공 직항 편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다.


흔히 팔레스타인을 여행한다고 말할 때 그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만을 의미한다. 가자지구는 2007년 6월부터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육해공 모두를 봉쇄하는 중이라 당국의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고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허가를 받기 어렵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3년 동안 살았던 필자도 공무 수행 목적으로 1박 2일 동안만 다녀온 게 전부다.


반면, 서안지구로의 입국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국경 인근에 39개의 출입국 검문소가 있고 별도의 검문 없이 통과할 수 있다. 비자도 필요 없다. 국경을 통제하는 게 팔레스타인 정부가 아닌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비자만 있으면 된다. 이스라엘은 공항에서 한국인 여행객에게 3개월 간 체류 가능한 방문비자(B/2)를 발급해 준다. 요르단을 통해서 서안지구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는데 이때도 이스라엘이 관장하는 국경검문소에서 방문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용 인파가 많아 검문소 통과에 수 시간이 소요되며 입국심사도 까다롭다.


2013년에 필자는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검문소를 넘나들며 서안지구를 여행 다니곤 했다. 당시에 서안지구는 여행자제 구역(여행경보 2단계)이었지만 현지를 걸어서 돌아다녀 보니 안전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팔레스타인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특별한 여행을 계획해 보았다. 물론, 가자지구는 제외했다.


서안지구는 팔레스타인 국토의 94%를 차지하지만 제주도 면적의 3배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는 길게 뻗어 있어 13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가 140km다.] 실제로는 직선으로 걸을 수 없는 데다 고저 차가 심하니 걸어야 할 길은 훨씬 길어진다. 그래서 여정을 나흘로 잡았다. 북쪽 국경에서부터 출발해 주요 도시들을 거쳐 남부 최대도시인 헤브론(Hebron)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다.


여행기를 들려주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특정 위험 구역을 찾아다니지 않고 도시와 마을 안에서만 지낸다면 안전하다.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함.] 하지만 팔레스타인도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세계 어디에서나 그렇듯 연고가 없는 여행객은 범죄자의 표적이 되기 쉽다. 현지어를 모른다면 더더욱 그렇다. 필자의 팔레스타인인 친구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성 관광객 3명이 아랍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르면서 길을 묻고 다니는 것을 보고 걱정돼서 경찰서에 데려다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당사자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괜한 참견이라고 불평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현지인이 보기에는 위태로웠던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건 여행의 묘미지만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는 아무런 대비 없이 도보 여행을 나선 것이 아니다. 이미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 팔레스타인 사회에 어느 정도 익숙했고 전화로 언제든지 통역을 해줄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마다 연락 가능한 지인이 있었고 위기 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정부 관계자도 여럿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만약을 대비해 정기적으로 주위에 위치를 알렸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읽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도시나 마을 밖을 걸어 다니지는 않기를 바란다. 특히 시위가 벌어지거나 잦은 충돌이 발생하는 지역은 피해야 한다. 옳든 그르든 지금은 서안지구에 ‘철수권고’(여행경보 3단계)를 내린 정부 지침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도 잊지 않길 바란다.     


[지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여행경로


1.2. 점령이 의미하는 것


무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는 2013년 9월의 어느 이른 아침, 여벌의 옷과 세면도구만 담은 가방 하나를 들고 잘라메(Jalameh)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검문소는 차량용과 행인용으로 나누어져 있고 총을 든 이스라엘 헌병(military police)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게다가 이스라엘군의 악명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잔뜩 움츠러들며 검문소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은 허무하게 끝난다. 검문 절차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긴 통로를 따라 들어가 회전문 몇 개만 밀고 지나오면 끝이다. 너무나도 손쉽게 통과하다 보니 팔레스타인이 분쟁 지역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들어오는 것만 쉬운 것이지 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국경검문소의 목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마음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 데에 있다.


사진. 잘라메 검문소. 아무런 검문 없이 그저 통로를 따라 걸어 회전문을 통과하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수 있다.



잘라메 검문소처럼 이스라엘 영토와 연결된 곳을 지날 때 이스라엘 정부의 허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같은 아랍 국가인 요르단으로의 국경도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고 임의로 출국을 금지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면 그 사람의 가족 구성원 전체가 출국이 금지될 수 있고 이런 내용이 당사자에게 통보되지 않는다.(1)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검문소에서 심사를 받기 전까지는 해외로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고 출국을 거부당하더라도 이유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몇 년 뒤 혹은 몇 십 년 뒤에 가능할지조차 모른다. 전날에는 출국이 거부되었지만 다음날에는 검문을 통과하는 경우도 잦다. 우리나라 정부 기관의 초청을 받은 연수생들이 요르단으로 국경을 넘는 걸 거부당해 연수를 포기한 사례들도 있다.


검문소를 통과하니 길게 뻗은 도로와 그 옆으로 펼쳐진 밭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중동이라고 하면 모래사막만 연상되지만, 팔레스타인은 지형과 기후가 매우 다양하다. 이곳 최북단 지역은 대체로 해발고도가 100~400m 정도로 낮은 편이고 평야 지대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수자원의 대부분을 갈취하고 있어 언제나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2)



서안지구는 원래 물이 부족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는 연간 578~814 MCM(백만입방미터)이 충전되는 대수층(the Mountain Aquifer)이 있다. 서안지구에서 80~90%가 충전되는 이 대수층에서 팔레스타인은 고작 14%을 추출할 수 있고 나머지 86%를 이스라엘이 가져간다.(3) 이걸로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수요가 전혀 충족되지 않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추가로 추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안지구는 요르단강과도 인접해 있으나 이스라엘 때문에 전혀 이용을 못 한다.


그러다 보니 팔레스타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땅에서 나오는 물을 이스라엘로부터 매입해야 한다. 2015년에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의 대수층에서 83.3 MCM을, 온천수(spring)에서 40.7 MCM를 추출했다. 그리고 그 절반이 넘는 70.2 MCM를 이스라엘 국영 수자원회사(Mekorot)로부터 사들였다.(4) 그런데도 필요한 양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당국이 공급량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인당 하루 100L 이상의 물[식수 외에도 상업, 공업, 농업용수 등을 모두 포함한다.]을 이용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장하지만, 서안지구 주민들의 1일 물 사용량은 79L에 그친다. 반면, 이스라엘인들은 그보다 3배 이상 많은 287L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3년에 1인당 282L를 사용했다. 한국수자원공사, 우리나라 물통계]


1) Badil, Forced Population Transfer.

2) UNCTAD, The Besieged Palestinian Agricultural Sector, UNCTAD/GDS/APP/2015/1, 2015.

3) B’Tselem, “Discriminatory water supply"; M. El-Fadel et al., "The Israeli Palestinian Mountain Aquifer." 

4) PWA, Water Resources; PCBS, “Selected Indicators for Water Statistics in Palestine (1), 2010 – 201."; PCBS, “Quantity of Water Purchased From Israeli Water Company (Mekorot) in Palestine by Governorate and Year(1), 2009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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