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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0. 2023

기독교 마을, 자밥디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5. 기독교 마을, 자밥디


카바티야를 빠져나가고 한 시간을 더 걸어 자밥디(Zababdeh)에 도착했다. 자밥디는 작지만 특별한 마을이다. 무슬림이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에서 몇 안 되는 기독교 마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랍인들이 모두 무슬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최초의 기독교도 중에는 아랍인이 있었다.(행 2:11)


7세기에 이슬람이 전파된 이래로 기독교는 점차 팔레스타인에서 소수 종교가 되었으나 그 후로도 많은 아랍 기독교도들이 믿음을 이어가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예수의 출생지로 유명한 베들레헴(Bethlehem)도 그중 하나다.


자밥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시가 넘었다. 아침도 안 먹고 열심히 걷다 보니 허기져 식당부터 찾았다. 거리가 약간은 낯이 익었다. 몇 개월 전에 이곳에서 열린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왔었기 때문이다. 3백 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피로연에 참석해 저녁부터 새벽까지 춤추고 노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잠시 그때의 추억에 잠기며 주위를 살폈으나 아직 영업 중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작은 마을에서는 식당이 3~4시가 넘어서 연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래도 열심히 돌아다녀 보니 골목 안에서 문이 열려 있는 식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아직 준비가 안 돼 가능한 요리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아무거나 요기가 될 만한 것을 부탁한다고 했더니 잠시 뒤 가지와 애호박 8조각과 묽은 수프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4시간 넘게 걸어서 체력을 보충하고 싶었는데 겨우 야채 몇 조각이라니. 허탈한 마음에 친구들한테 얘기해 주려고 사진까지 찍어놓고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런데 야채 안에는 밥과 다진 고기가 들어있었다. 행복한 반전에 놀라고, 그 맛에 한 번 더 놀랐다.


사진 5. 애호박이나 가지 안에 밥과 다진 고기를 넣은 쿠사 마흐시(kousa mahshi). 이날 처음 맛본 이후 가장 좋아하는 팔레스타인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자 사장님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팔레스타인에서 뭘 하고 있는지 등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이었다. 작은 마을의 식당 주인이 영어를 잘한다는 게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팔레스타인에는 직업과 관계없이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해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기도 하겠지만, 학교 교육만으로도 회화에 능숙한 청년들도 보았다.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자세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어진 질문 공세 중에 자밥디는 왜 왔냐는 질문이 나왔다. 약간 난처했지만 걸어서 종단여행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역시나 주인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체 목적이 뭐냐고 되물었다. 무언가 굉장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팔레스타인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서 계획한 여행이었다.


필자는 우리 정부의 개발도상국 무상원조사업을 집행하는 KOICA 팔레스타인 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당시에는 사무소와 주거지가 이스라엘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바라보는 차창 밖의 풍경과 회의실이 접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세상의 전부였다.

* 팔레스타인 사무소는 2008년에 이스라엘의 헤르쯜리아(Herzliya)에서 개소했고, 필자가 근무 중이던 2014년 7월에 팔레스타인 라말라(Ramallah)로 이전했다.


이래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휴일에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국경을 넘어 팔레스타인 도시를 여행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이 워낙 작다 보니 반년 정도 지나자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거의 다 둘러보았다. 이제는 도시 밖으로 나가 작은 마을과 황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닷새간의 연휴가 찾아왔다. 그래서 이왕이면 거창하게 종단여행을 해보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나자 주인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여행이 성공하길 빈다고 응원해 주었다. 그리곤 다른 질문들을 쉴 틈 없이 던졌다. 남북한 관계가 어떤지, 한국에서 사는 건 위험하지 않은지, 팔레스타인에서 어느 마을이 제일 좋았는지 등등. 길게 이어진 대화 끝에 마침내 식당을 빠져나왔을 때는 한 시간 반이 넘게 지난 뒤였다.


의도치 않게 너무 늦어져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루 중 가장 더울 시간인데도 구름이 많이 낀 덕분에 아침보다는 나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했다. 푹 쉰만큼 힘내서 늦어진 일정을 만회하려고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빠르게 걷다 보니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기에 잠깐만 쉬고 다시 걸었다. 이전만큼 빠르게 걷기는 힘들었지만 별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때는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고생길이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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