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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0. 2023

예기치 않은 고비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7. 예기치 않은 고비


투바스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나블루스까지는 아직 5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 그런데 지도를 보니 중간에 다른 마을이 없었다. 그래서 출발 전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이른 저녁도 먹고, 엄지발가락 부분이 깊게 파여 버린 깔창을 버리고 새 걸로 장만했다. 마지막으로 슈퍼마켓에 들러 500mL 생수 4개를 샀다. 그동안 시간당 1L씩 마셔왔기 때문에 부족할까 봐 걱정되었지만 너무 무거우면 걷기 힘들어 갈증이 더 날 것 같았다. 다행히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시원해질 터였다.


나블루스로 가는 길은 풍경이 좋았다. 군데군데 심어진 묘목과 꽃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길 바로 옆 언덕에서 양 떼를 방목하고 있는 어린 목동들도 만났다. 목동들이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연거푸 했다. 잠깐 쉬면서 구경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지만 어두워진 하늘을 보니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목동들에게 손을 마주 흔들며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 7. 목동들과 양 떼. 양치기 개도 발견했다. 도시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풍경이 낯설고 마치 동화책을 보는 느낌이었다.


해가 지고 나니 확실히 더위가 가셨다. 그러나 땀은 여전히 쏟아지듯 흘러내려서 물을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물이 빨리 떨어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이 매우 작은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최근에 생겨난 듯했다. 오래된 지도를 가져와서 괜한 걱정만 했다고 불평하며 물을 실컷 마신 뒤 새로 사서 채워 넣었다. 그런데 1시간 뒤에 또 다른 마을이 나타났다. 20년 사이에 이 짧은 거리에 새로운 마을이 2개나 들어서다니.(*) 분쟁국가란 이미지에 갇혀 팔레스타인이 정체된 상황이었을 거라 짐작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오였는지를 깨달았다.

* 두 마을 모두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에 마을로 공인되었다.


6시가 넘어가자 주위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도로의 갓길을 걸어갔다. 도로 너머는 온통 암흑지대였다. 인근 마을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800m인 나블루스에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마을들이 저 멀리 발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해발고도 100m인 제닌에서 출발했으니 오늘 하루 동안 웬만한 산 하나를 등반하고 있는 셈이다.


사진. 밤하늘...이 아니라 밤바닥을 수놓은 불빛들.


등산길의 마지막은 정비되지 않은 갓길 때문에 크게 고생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갓길이 움푹 패고 자갈이 잔뜩 깔린 비포장 길로 바뀌었다. 발목이 극심히 아파졌다. 절뚝거리며 천천히 조심스레 걷자 지나가는 차들이 태워주겠다며 멈춰 섰다. 괜찮다고 대답해도 두 번 세 번 되물어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냥한 인심이 고마웠지만,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도록 고통을 참고 빠르게 걸었다. 한 시간을 그렇게 고생했더니 갓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블루스라 적힌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며 기뻐했지만 착각이었다. 도시 입구에서부터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는 다리를 절며 1시간 반을 더 걸어야 했다. 과연 북부 최대의 도시다웠다.


사진. 나블루스의 밤거리


밤 10시가 돼서야 숙소에 도착했고 바로 샤워부터 했다. 오늘 하루 동안 10L가 넘는 물을 마셨고 그 물들을 죄다 땀으로 배출했기 때문에 찝찝했다. 저렴한 모텔이지만 씻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물이 잘 나와서 좋았다. 샤워를 끝낸 뒤에는 슈퍼마켓에서 사 온 빵과 음료수로 저녁을 때웠다. 내일을 위해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식욕이 없고 무엇보다도 발목이 아파 식당까지 가기가 싫었다. 샤워할 때 보니 발목이 꽤 많이 부어 있었다. 걱정되었지만 자고 나면 부기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내일부터는 오늘 같은 강행군이 없다는 데에 위안을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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