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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1. 2023

검문소에 막히다.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 역사의 무게

2.1. 검문소에 막히다.


아잔 소리에 잠이 일찍 깼다. 숙소가 모스크 근처에 있어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정신은 들었지만 발목도 아프고 몸이 찌뿌듯해서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9시 반이 돼서야 일어났다.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자 새벽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무리한 계획이었다. 뒤늦게 샤워를 하고 로비로 나가 휴대폰으로 메일부터 확인했다. 유엔 측 사업관계자로부터 받을 업무 연락이 있었는데 워낙 저렴한 모텔이라 그런지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메일이 와 있었고 로비 의자에 앉아 장문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출발하고 점심 무렵에 쉬면서 메일을 보내고 싶지만, 모텔을 나서면 인터넷을 쓸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이동통신망 개발을 금지하고 있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3G조차 지원되지 않는다. 점령지의 현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대폰 자판으로 힘들게 메일을 다 보내고 나니 벌써 11시였다. 밥 먹을 시간도 아껴야 할 것 같아 빵을 하나 사서 들고 먹으면서 출발했다. (2018년에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에서 3G 서비스 공급을 허가했다.)


사진. 나블루스의 전경. 나블루스는 2천 년 전에 로마 제국이 건설한 도시로, 팔레스타인 북부지역의 중심지다. 빼곡히 늘어선 건물들은 도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어제 지나온 길을 다시 한 시간 반 동안 천천히 걸어 나블루스를 빠져나왔다. 도시 남쪽 입구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국경도 아닌데 무슨 검문소냐고 의아하겠지만,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내부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다. 2017년 1월을 기준으로 59개의 상설검문소(fixed checkpoint)가 운영되고 있으며, 안보 상황에 따라 수십, 수백 개의 비정기(flying) 검문소가 추가로 운영된다.


과거에는 검문소 때문에 수년간 직장도 학교도 못 가는 게 일상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통제가 완화돼 평시에는 검문 없이 바로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작은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검문이 강화돼 극심한 교통 체증이 일어나고 심할 때는 도로가 폐쇄되거나 마을 전체가 봉쇄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서 시외 이동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다행히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검문소 초소에는 헌병 3명이 서 있었지만 검문을 하지 않고 모든 차량을 그냥 통과시키고 있었다. 안심하며 걸어갔더니 갑자기 헌병들이 멀리서 멈추라고 소리쳤다. 걸어서 여행 중이니 통과시켜 줄 수 있냐고 외쳤지만 돌아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행 중이라 그런데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말하며 두 손을 들고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 발자국도 옮기기 전에 헌병은 다시 한번 돌아가라고 외쳤고 총을 들어 올리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포기하고 바로 뒤돌아섰다.


헌병들이 통과시켜주지 않은 것은 이 검문소가 차량 전용이기 때문이다. 도보가 있긴 하지만 이용이 금지된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툴카렘(Tulkarm)이란 도시를 여행한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근처 검문소로 갔더니 헌병이 여기는 차량 전용이라서 통과가 안 되니 남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나오는 다른 검문소로 가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곳으로 가보니 이번에는 팔레스타인인 전용이라며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결국, 택시를 타서 또 다른 검문소로 가서야 겨우 이스라엘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검문소는 통행대상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차를 타고 통과하거나 검문소가 없는 다른 도로로 우회해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회할 경우 적어도 한두 시간은 더 걸리기 때문에 오늘 중으로 라말라에 도착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차를 타게 되면 걸어서만 여행한다는 계획을 포기하는 셈이라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늦게 일어난 것을 반성하며 검문소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뒤돌아 간 뒤 지나가는 세르비스(service)를 탔다.


세르비스는 7명에서 10명이 탑승 가능한 합승택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애용하는 대중교통이다. 우리로 치면 택시와 버스의 중간 개념인데,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도중에 어디에서나 승하차할 수 있고 이동한 거리만큼 돈을 낸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요금을 탑승할 때가 아니라 한창 이동하고 있을 때나 내릴 때 낸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차량 맨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자기 앞에 앉은 사람에게 전달해서 요금을 내는 재미있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운전 중에 돈을 받고 잔돈도 거슬러주고 있으니 안전하지 못하다.


사진. 세르비스



세르비스 안에는 딱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차가 출발했고 잠시 후 검문소를 바로 통과했다. 이런 형식적인 절차 때문에 걸어서만 여행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바로 내리려고 하자 옆 좌석의 청년이 유창한 영어로 이유를 물어왔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 청년은 다음 검문소까지 통과하고 내릴 것을 권했다. 그곳도 차량만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걸어가면 1시간 반이 넘게 걸릴 거리였지만 역시 차로는 순식간이었다. 걸어서 여행할 때는 느낄 수 없던 속도감에 상쾌하면서도 걷는 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다. 몇 분 뒤 두 번째 검문소에 도착했고 통과하자마자 바로 내렸다. 아까 그 청년이 꼭 성공하길 바란다며 응원을 해 줬다. 덕분에 웃으며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서안지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60번 고속도로를 걷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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