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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1. 2023

레모네이드에 담긴 온정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2. 레모네이드에 담긴 온정


두 다리로 여정을 재개한 지 두 시간이 흘렀다. 땡볕에 갈증으로 목이 탔다. 나블루스에서 사 왔던 물은 다 떨어진 지 오래다. 중간에 마을 하나를 통과했지만 도로 주변에 슈퍼마켓이 안 보여 그냥 지나쳤던 것이 실수였다. 그때 시내로 들어가 물을 사 왔어야만 했다. 어제와는 달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라 땀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데다 그런 더위마저 잊게 할 정도로 발목이 아파서 걸음이 더뎠다.


고생 끝에 겨우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도로변에는 가게가 없었다. 다리도 아픈데 길 찾느라 고생하긴 싫어서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밭에서 경운기를 돌리고 계신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장문의 아랍어가 되돌아왔다. 슈퍼마켓을 말한 후 빈 물통을 보이며 아랍어로 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느낌상 집으로 초대하시는 듯했다. 폐를 끼치기는 싫었지만 목이 너무 마르다 보니 머리를 연신 굽히며 감사를 표하고 따라갔다.


아저씨네 집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족들이 방에서 하나둘씩 나오며 인사를 했다. 자식들이 일곱이나 되었다. 막내가 갓난아기인 걸 보니 식구 수가 앞으로도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결코 짧을 수 없는 인사를 마치고 아저씨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큰딸을 제외한 다른 식구들도 함께 들어와 빙 둘러앉았다. 4평 남짓한 작은 방에는 텔레비전과 옷장만 있었다. 응접실이 아니라 침실인 것 같았다. 그동안 협력기관의 부유한 사람들의 집만 방문하다 일반 농민의 집을 보게 되니 빈부격차가 실감 났다.


* 2015년을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의 가구당 평균 인원은 5.2명이다. PCBS, "Summary of Demographic Indicators in the Palestine by Region."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으나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변변찮은 아랍어 실력으로 이름이랑 여행 중이라는 것만 간신히 말하고 그 뒤부터는 미소만 짓고 기다렸다. 다행히 아이들은 동양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잠시도 눈을 돌리지 못하고 신나 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갈증이 너무 심해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다. 혹시나 물을 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싶어 다시 부탁할까 고민에 잠길 무렵 드디어 큰 딸이 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컵 안에 들어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수제 레모네이드였다. 방금 만든 것인지 미지근했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에게도 정성을 표하고자 레모네이드를 준비했고 그러느라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감사하다고 연신 말하며 단숨에 한 잔을 다 들이켰다. 큰딸이 웃으며 잔을 가져가더니 부엌에 가서 바로 다시 채워왔다. 이번에는 유혹을 참고 한 모금씩 마시며 큰딸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큰딸은 영어를 조금은 했지만 대화가 이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짧은 아랍어 실력을 아쉬워하며 대신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손장난을 치며 놀아주었다. 10여 분을 놀아주고 나서 조금이나마 성의를 표했다고 위안 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 인사를 드리며, 염치 불고하고 아주머니께 빈 물통을 건네 물을 담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아주머니는 거기에 얼음물을 가득 채워주셨다. 현관으로 나오니 온 가족이 배웅을 나왔다. 고개를 90도로 숙여 감사 인사를 여러 번 드리고 나서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팔레스타인에 오기 전에는 이곳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친절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유대인에게 고향을 빼앗기게 된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토는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인들이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 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유대민족주의자들이 2천 년 전의 고대 유대 국가를 이곳에서 재건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팔레스타인 땅의 55%에 유대 국가를 세우는 계획을 ‘승인’한 것은 다름 아닌 유엔이었다.

* 지명과 그 경계에 대해서는 본문 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유대 국가의 영토로 지정된 지역을 ‘유대화’하기 위해 나섰다. 즉, 토착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추방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저지른 것이다. 이듬해 5월에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구하러 군대를 파견했으나 패배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유엔이 정해준 국경선을 넘어 팔레스타인 땅의 78%까지 점령했다. 국제 사회는 이 결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했다. 그게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토가 된 것이다.


정복 전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나머지 22%의 땅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기습 공격한 후 점령했다. 유엔과 국제 사회도 이번만큼은 이스라엘을 옹호하지 않고 불법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비난의 목소리만 있을 뿐 아무런 실질적인 제재도 뒤따르지 않았다. 국제 사회는 팔레스타인이 지도에서 지워지는 것을 방관했다.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누구도 그런 역사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인을 비난하기보다는 환대하고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로 겪는 역경을 알리고자 노력해 왔다. 그 노력은 최근 들어서야 빛을 발했다. 2012년에 열린 제67차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 비회원 옵서버 ‘국가’(non-member observer State)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개의 유엔 회원국 중 138개 국가가 찬성표를 던졌다.(1)


이 세기의 사건에서 우리나라는 기권했다. 팔레스타인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의 결정을 알고 유감을 표명했다. 반면,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한국이 당연히 찬성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알고 있어서 그렇게 추측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정부가 기권했다는 사실을 말할 때마다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필자가 한국을 떠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온 날이 바로 이 표결이 있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누구를 만나도 첫 만남에서부터 이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때마다 인권과 반식민주의 정신을 외면했다는 부채감을 크게 느꼈다. 그래서 아직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친절이 무겁게 느껴진다.


1) 9개 국가는 반대, 41개 국가는 기권, 5개 국가는 결석했다. UNGA Resolution 67/19, Status of Palestine in the United Nations, A/RES/67/19 (December 4, 2012); 이전까지는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유엔에서 옵서버 단체(observer entity)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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