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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1. 2023

평화를 위협하는 정착촌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3. 평화를 위협하는 정착촌


오늘 일정의 3분의 1밖에 오지 않았는데 벌써 4시였다. 아침에 너무 늦게 출발한 게 문제였다. 이대로는 오늘 중으로 라말라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래도 쉬었던 덕분에 발목이 좀 괜찮아져서 다시 빠르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갓길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폭이 1m 정도로 줄어들었다. 거기다 1차선 도로라서 모든 차가 바로 옆을 지나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싶어서 갓길을 포기하고 도로 옆에 있는 흙길을 걸었다. 흙길은 대부분 경사져 있어 걸을 때마다 발목이 꺾였다. 자연히 걸음은 느려지고 통증은 격해졌다. 다 포기하고 지나가는 세르비스를 잡아탈 생각도 해봤지만 이렇게 좁은 갓길에서 차를 멈춰 세운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정을 세울 때부터 고속도로의 갓길을 걷는 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원래는 길을 벗어나 언덕을 넘을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다리를 다쳐 어렵게 되었고, 설령 다리가 멀쩡했더라도 이곳에서는 도로를 따라 걷는 게 더 안전했다. 인적 드문 곳을 걷다가 이스라엘 군인과 조우하면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는데 이 주변은 정착촌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특히 위험했다.


‘정착촌’(settlement)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토 안에 만든 유대인 식민촌(colony)이다.(1)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거지와 농지를 강제로 빼앗아 유대인들에게 분배해 주거나, 총기로 무장한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강제로 쫓아낸 뒤 정부가 사후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승인해 주는 방식으로 건설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국제법적으로 불법행위지만, 196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정착촌이 건설되고 있고 같은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156개의 정착촌과 97개의 미허가정착촌(outpost)(*)에서 465,400명의 이스라엘 국민이 살고 있다. (2)

*1990년대 이후에 정부의 허가 없이 지어진 정착촌으로, 이스라엘 국내법에 저촉된다.

    

지도. 2012년 12월 기준 정착촌 구역


정착촌은 서안지구에서 분쟁의 뇌관이다. 정착촌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해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정착민의 차량에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의 집이나 차량을 공격하거나 농민의 주요 생계 수단 중 하나인 올리브 나무를 불태우는 사건은 더욱 빈번히 일어난다. 연간 1천 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정착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을 정도다.


서구 언론의 편향적인 태도 때문에 정착민들의 테러는 잘 보도되지 않지만,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에 따르면 2012-16년 동안 정착민들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손해를 입은 것보다 더 많은 신체적, 재산상의 피해를 끼쳤다. 정착민의 폭력은 팔레스타인 경찰이 간섭할 수 없는 C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나 등하굣길에서 폭행당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불안감에 시달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포기하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3)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정착민들의 폭력 행위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정착촌 주변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이념적으로 조직화한 폭력이라고 설명한다. 정착민들은 실탄을 장전한 총으로 무장하고 인종적 면책특권까지 부여받는다. 최근 10년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정착민의 범죄를 고발해도 92.7%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착민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이 정착촌 인근에 상시 주둔하고 있다.(4)


정착촌 인근의 외지를 어슬렁거리다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도로를 따라 걷는 게 나았다. 빠르게 걷는 건 포기하고 안전하게 가는 것만 생각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그렇게 고생하고 나니 다시 갓길이 충분히 넓어졌다. 그제야 숨을 고르며 지도를 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남쪽으로 향해야 할 도로가 언제부턴가 동쪽으로 경로를 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갈림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는 지금 걷는 60번 고속도로가 남쪽으로 나 있으니 그대로 걸어가는 게 맞았다.


긴가민가하며 계속 걷다 보니 안타깝게도 쉴로(Shilo) 정착촌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정말로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지도가 문제였다. 남쪽으로 나 있는 도로는 일반 도로였는데 두꺼운 선으로 표기되고,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고속도로가 얇은 선으로 잘못 표기되어 고속도로가 남쪽으로 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20년 동안 생긴 변화일런지도 모르겠다.


1시간이 넘게 엉뚱한 길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게다가 고속도로가 아니었다면 불안해할 필요도, 발목이 지금처럼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중요한 건 앞으로였다. 통증을 참고 어제와 같은 속도로 걷더라도 7~8시간이나 더 걸어야 하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서도 걸어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결국, 인근 마을에서 세르비스를 타기로 했다.


도보 여행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정착촌이라도 구경해서 여행의 의의를 만들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정착촌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할 수 있으므로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전망을 보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도로 주변에는 정착촌이 관리하는 농지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이 팔레스타인인들 소유였으나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국유지로 선포한 후 정착민들에게 넘겼다. 게다가 이 지역에 있는 온천수도 정착민들이 무력으로 강제 점거해 빼앗아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방식으로 서안지구 곳곳에서 정착촌이 확장하고 있으니 분쟁이 끊일 리 없다.(5)


사진. 쉴로 정착촌과 인근 포도밭



1)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유엔에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고 그 영토 안에 지어진 모든 유대 정착촌들이 이스라엘의 국적과 문화를 유지한 ‘외국인 이주자’들의 주거지이므로, 정착촌이 아니라 식민촌이 정확한 용어다. 다만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settlement로 명명했고 국제 사회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 책에서는 ‘settlement’(즉,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해석)의 번역어로 정착촌으로 표기하였다. 국내에서는 ‘점령촌’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강제점령이라는 특성을 반영한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려면 식민촌으로 부르면 된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에는 유대 정착촌을 흔히 식민촌이라고 불렀다.

2) Peace Now, Unraveling the Mechanism behind Illegal Outposts, 2017;

3) UNOCHA, Humanitarian Bulletin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y, October 2015.

4) Ibid, Unprotected; Yesh Din, Law Enforcement On Israeli Civilians In The West Bank.

5) UNOCHA, How dispossession happens; Ibid, Fragmented Lives Humanitarian Overview 2015; Ibid, Humantarian Bulletin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y, October 2016, 7-8; Peace Now, The Grand Land Robb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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