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환빈 Oct 11. 2023

행정의 중심지 라말라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5. 행정의 중심지 라말라


라말라의 밤은 밝았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현대화된 도시답게 대부분의 건물이 불이 켜져 있고 거리에는 낮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택시의 차창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던 세련된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비쳤다.


사진. 라말라의 전경. 출처는 https://www.facebook.com/PalestineTradeTower/


고층이라 해봐야 10층에서 20층 정도에 불과하지만 경제 발전 수준을 재고할 만한 높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이곳은 겨우 3천 명의 기독교도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런데 20세기 말에 급변한 정치 지형 덕분에 급성장하게 되었다.(1)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자국의 영토로 병합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할 것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내 아랍 인구의 비율이 높아져 유대 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이 약해질 것을 꺼린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서안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국토도 아니고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지도 않는 그저 ‘점령된 상태’로 남아 있다.


유일한 예외가 동예루살렘(East Jerusalem)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전쟁 때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서쪽 지역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사는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는 동예루살렘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7년 전쟁으로 동예루살렘(6.4㎢)을 손에 넣게 되자 이스라엘은 인근의 팔레스타인 마을 30여 개(64.6㎢)와 함께 서예루살렘에 병합시켰다. 오늘날에는 병합된 모든 지역(71㎢)이 동예루살렘으로 불린다.


1994년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탄생했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천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병합된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정부의 어떤 관할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도시들에 청사를 지었고, 특히 서안지구의 지리적 중심지이자 동예루살렘에 인접한 라말라에 대부분의 행정부처를 위치시켰다.(2)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라말라는 외부에 행정수도 혹은 나아가 사실상(de facto)의 수도로 각인되었고 많은 자본이 유입되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급속도로 발전한 라말라는 돈을 벌 기회의 도시로 주목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새로운 인구의 유입은 라말라를 익명성의 도시로 변신시켰다. 다른 도시나 마을들에서는 사소한 일상도 동네 주민들에게 공유되어 사생활의 경계가 약하지만, 라말라의 주민들은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끈끈한 유대 속에서 공동체가 함께 더불어 살던 생활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라말라가 전통을 잃어버리고 서구화되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유일의 ‘자유의 도시’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주위 시선이 집중되는 사람들에게 라말라는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


외국인인 필자는 또 다른 관점에서 라말라를 바라본다. 분쟁국가의 정치, 행정적 중심지가 세계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세상에 열려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언론매체에서 그리는 테러리스트들의 닫힌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가장 놀라웠던 점 중 하나는 기독교 마을이었던 라말라의 기원이 법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이다. 무슬림 인구가 많이 유입되면서 기독교 인구는 소수가 되었으나 라말라의 시장은 기독교도로 선출하도록 법에서 정하고 있다. 라말라의 정치, 경제적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시 문화도 이슬람 교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서 술집과 주류 전문점이 있고 식당에서도 술을 판다.


덕분에 라말라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도시다. 다른 기독교 마을이나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1948년 전쟁으로 서안지구와 가지지구로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대부분의 기독교 마을과 도시는 무슬림이 다수 인구가 되었으나 기독교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시내 중심지인 마나라(Manara) 광장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다. 오늘 묵을 숙소는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다시 나와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온종일 먹은 거라곤 아침에 나블루스에서 먹은 빵밖에 없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지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잘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1) 1922년에 라말라에는 2,972명의 기독교도와 125명의 무슬림, 7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J. B. Barron, Report and General Abstracts of the Census of 1922, Great Britain (Jerusalem: Greek Convent Press, 1923); 2016년을 기준으로 라말라의 인구는 35,140명이며, 인접 도시인  알비레(Al-Bireh)와 합치면 84,027명이 된다. PCBS, "Estimated Population."

2) 1994년에 최초의 정부 청사가 위치한 곳은 가자였다. 이후에 서안지구의 관할권을 점차 이양받으면서 라말라를 비롯한 서안지구 도시들에 정부 기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전 09화 팔레스타인 국가 안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