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 평화 없는 평화협정
3.1. 서안지구를 갈라놓은 검문소와 분리장벽
오늘도 늑장을 부리다 아침 늦게 숙소를 나왔다. 우선, 마나라 광장으로 걸어갔다. 광장을 중심으로 넓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 주위에는 행상인과 인파로 가득했다. 광장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아점을 먹고 나서 다음 목적지인 동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사진. 2년 뒤에 찍은 마나라 광장의 모습
동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중간에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벗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검문을 받는다. 짧으면 10~30분 만에 통과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많으면 두세 시간이 넘게 걸린다. 운이 나빠 검문소가 폐쇄되면 다른 검문소를 찾아 길을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변수를 생각하면 오늘 아침도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검문소에 사람이 적기만을 빌며 가능한 빠르게 걸었다.
라말라는 자주 여행 다니던 곳이라 매우 익숙했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자신 있게 걸어갔다. 그런데 10대 남자아이들이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시니, 시니!”(중국인)라고 외치면서 졸래졸래 따라오기 시작했다. 유독 외국인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외국인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자기들 딴에는 반갑다고 장난치는 것이다. 이런 장난은 반응을 보이면 계속하기 때문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하나둘씩 제풀에 지쳐 따라오는 것을 멈췄다.
1시간쯤 걷다 보니 차량이 쭉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문소에 도착해 간다는 신호였다. 이 앞에 있는 칼란디야(Qalandiya) 검문소는 동예루살렘으로 연결된 주요 도로에 있는 데다가 탑승자의 신분과 수하물을 하나하나 검사하기 때문에 언제나 교통 체증이 심각하다. 오늘도 검문소 입구로부터 100m가 넘게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니 차량이 통과하는 데 1시간은 족히 걸릴 듯했다. 검문소를 매일매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기다림이다.
검문소에 도착하니 8-9m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이 밀입국과 무기 밀수를 통제한다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세우고 있는 “보안장벽”(Security barrier)이다. 책이나 언론에서는 콘크리트 벽만 보여주지만, 서안지구에 있는 장벽의 대부분은 철조망이고 약 10%만이 콘크리트 벽으로 건설되고 있다. 가자지구에는 1996년에 장벽 건설이 완료되었으나 지하 터널을 막기 위해 2016년부터 장벽을 깊게 설치하는 재공사를 하고 있다. 2021년 12월 현재, 이스라엘은 완공을 선언했다.
사진. 동예루살렘과 라말라 사이에 있는 장벽
‘보안’장벽은 역설적이게도 ‘평화’협상의 결과물이었다.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1987년부터 인티파다(Intifada, 봉기)라고 불리는 대규모 대중저항운동을 일으켰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완강히 거부했으나, 수년간 계속된 인티파다와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결국 협상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1993년부터 오슬로 평화협상과정(Oslo Peace Process)이 시작된다.
이듬해 탄생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첫 성과물이었다. 그러나 평화협상으로 자유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인 반대파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1994-96년 동안 가자지구에 장벽을 건설했다.
반대파의 예상대로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테러를 구실로 협상을 계속해서 지연시켰다. 그리고 1999년까지 동예루살렘과 정착촌, 군사 지역을 제외한 모든 C 지역의 관할권을 이양한다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2000년에 열린 최종지위협상에서는 결국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온전히 돌려주지는 않으며, 난민들의 귀환도 인정하지 않고, 주권도 제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협상이 결렬되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인티파다를 재개했다. 그러나 2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군에 무력으로 진압당해 결실을 거둘 수 없었다. 테러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서안지구에마저 장벽이 건설되었을 뿐이다.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장벽 건설에 격렬히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자지구에서와는 달리(1) 장벽이 국경선을 따르지 않고 내부 깊숙이 들어와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벽의 건설경로에 있던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가와 농지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공 후에는 서안지구 토지의 9.4%가 장벽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
지도. 2018년 10월까지 건설된 분리장벽과 향후 계획. 서안지구 국경선 안에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국경과 장벽 사이에 있는 '이음매 구역(Seam zone)'에서 토지를 경작하거나 열매를 수확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거주민들을 장벽 안쪽으로 추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과 인권단체들은 분리(separation)장벽, 인종차별(apartheid)장벽 혹은 병합(annexation)장벽이라 부르며 비판한다.(2)
2004년에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는 서안지구 내부에 장벽을 짓는 것은 국제법에 위반되며 이미 완성된 장벽은 철거해야 한다는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꾸준히 건설을 계속해 2016년 현재 64%를 완성했다.(3)
사진. 아이다(Aida) 난민촌에 인접한 분리장벽.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이 화염병을 던져 감시탑이 검게 변색되었다.
장벽을 따라 걸으며 마침내 행인용 검문소에 도착했다. 꽉 막힌 도로를 보고 걱정했으나 다행히 한산했다. 칠이 벗겨져 잔뜩 녹이 슨 회전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여러 개의 검문 창구 중 하나만 열려 있고 10여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고 공기는 탁했다. 어디서나 활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지만 여기서는 다들 조용해지곤 한다.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렇게 서안지구를 빠져나가 동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예루살렘 영주권자이거나 이스라엘 당국으로부터 입국 허가를 취득한 자들만 통과할 수 있다. 허가증(permit)은 이스라엘 내 근로나 치료, 종교행사 참여 등을 목적으로 신청할 수 있고 제한적으로만 발급되고 있다. 매년 약 20만 명이 치료나 간병, 병문안을 목적으로 허가증을 신청하지만 20%가 거절당하거나 적시에 승인을 받지 못해 포기한다.(4)
검문 절차는 의외로 간단하다. 3~4명씩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 컨테이너벨트에 소지품을 넣는다. 금속이 있는 허리띠도 풀어서 넣어야 하고 때로는 신발도 벗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한 명씩 차례대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고 창구에서 신분증이나 여행허가증 혹은 여권을 제시한다.
통과 허가를 받으면 출구로 가서 소지품을 찾고 회전문을 열고 나가면 끝이다. 단순한 과정이지만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그룹이 다 통과하고 난 다음에 문을 바로 열어주지 않고 뜸을 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0여 분 이상을 기다리게 하거나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창구를 폐쇄한 경우도 여러 번 경험했다.
사진 13. 툴카렘 인근 검문소. 검문소 통행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시장이 형성되었다.
오늘도 1분에 1명씩 통과하는 느린 속도로 절차가 진행되었다. 10분 정도 기다린 끝에야 차례가 왔다. 소지품을 컨테이너벨트에 넣고 금속 탐지기를 통과했다. 그리고 창구 앞에 서서 웃으며 여권을 보여주었다. 갓 스무 살이 된 것 같은 앳된 헌병은 여권에 눈길을 잠시 두더니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검지 하나만 움직여 통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굴에는 지루하고 귀찮다는 표정이 다분했다. 최소한의 성의나 예의도 갖추지 않는 그녀를 보며 기분이 좋을 리 없지만 워낙 익숙해진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짐을 챙겨 검문소를 빠져나갔다. 외국인인 필자에게도 저 정도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2015년에 이스라엘 헌병들은 “검문소의 일상에는 (타당한 이유 없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욕하고,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고, 휴대폰을 압류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양심선언을 했다. 일부 군인들이 단순히 즐기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키거나 일부러 3시간 이상 땡볕에 서서 대기시킨 사례도 보고되었다.(5)
1) 단, 이스라엘은 장벽에 인접한 가자지구 토지의 10% 이상을 군사적 완충지대로 설정하여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UNOCHA, Between the Fence and A Hard Place; Ibid, Fragmented Lives.
2) HaMoked, The Permit Regime Human Rights Violations in West Bank Areas Known as the 'Seam Zone.'
3) Tovah Lazaroff, "Analysis: Why Benjamin Netanyahu can’t finish West Bank security barrier," Jerusalem Post.
4) Palestine Works, Occupied East Jerusalem; Physicians for Human Rights, Divide & Conquer.
5) Yoav Zitun, "Humiliation and sloppy security checks at IDF checkpoints," Ynetnews, 27 Jul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