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수많은 산하기관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입니다. 그중에는 UNDP나 UNHCR처럼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곳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인이 듣도 보도 못한 '작은' 기관들입니다. UNRWA도 그런 듣보잡이 아닌가 생각하신 분들이 많겠지만, 사실 UNRWA는 유엔의 기구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입니다. 당연히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요. 다만, UNRWA는 중동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에 이 UNRWA의 직원 12명이 가담했다는 이스라엘의 발표로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처음 있던 일도 아니고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사안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대량무차별학살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서구 국가들이 반전을 꾀하려는 여론전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지 한번 자세히 살펴볼까요?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에 출범했습니다. 당시 유엔은 이스라엘이 추방한 난민들이 고향에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에 어떤 제재도 취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신, UNRWA를 만들어 난민들이 체류 중인 아랍 국가들의 경제적 성장을 돕고 궁극적으로 난민들을 재정착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683)
사진 :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쫓겨난 난민들이 머물던 임시 거처(텐트, 동굴, 막사). 사진은 UNRWA 제공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난민들은 유럽의 식민이주자들에게 빼앗긴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UNRWA가 주도하는 난민촌 개발에 반대했습니다. 콘크리트 집을 지어줘도 부숴버렸습니다. 결국, 유엔은 재정착 유도를 포기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 난민의 귀환을 강제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난민들이 그저 '난민 생활'을 이어가는 것만 지원하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UNRWA는 수년의 임기만 부여받은 임시 기구였으나, 난민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계속해서 임기를 연장해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UNRWA는 흙길에 나무를 심고 천막을 제거하고 진흙집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난민촌을 꾸며서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어요. ... 우리는 난민촌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해요. UNRWA가 하던 것은 우리의 체류를 영구적으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 다음날, 우리 꼬마들이 나무를 뒤집어엎고 춤을 추면서 당시 난민촌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불렀어요. “나는 누구지? 너는 누구니? 나는 귀환자야! 나는 귀환자야!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686)
이렇게 임시기관에서 준영구기관으로 발전하면서 UNRWA는 유엔기구 유일의 특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다수의 직원을 현지인으로 채용한 점입니다. 모든 유엔 기구들은 다양한 국적을 골고루 채용하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급여를 지불합니다. 그러나 URNWA는 낮은 급여를 주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대거 채용했습니다. 그래서난민의 일자리 문제를 완화하고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덕분에 UNRWA는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효과적으로 운영됩니다. UNRWA의 꾸준한 설득으로 8년 만에 난민들은 콘크리트집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에 있는 수많은 유엔기구 중UNRWA는 유일하게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존중받습니다.나머지 기구들은 돈만 잡아먹는다고 비판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을 직원으로 대거 채용하자 생긴 부작용도 있습니다. 바로 정치색입니다. 유엔기구에서 일하게 됐다 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악행과 현실의 고난을 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UNRWA의 많은 직원들이 공개적으로나 비공개적으로나 팔레스타인 정치 단체들을 지지하고 이스라엘과의 투쟁에 힘을 보탰습니다. UNRWA가 지원하는 난민촌은 원래 'UNRWA 수용소'라고 불렀으나, 난민들이 수용소를 중심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자 UNRWA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고, 그래서 이름을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바꾸는 등 거리두기에 나섰습니다.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식민 지배를 계속하며 주민들의 인권을 억압하고 경제수탈을 자행했습니다. 특히 서울의 절반 면적에 2백만 명이 사는 가자지구에서 주민들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2007년부터는 17년간 육해공이 완전봉쇄되면서 필수적인 물자조차 들여오지 못해 전기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열악해졌습니다. 이들을 가족으로 둔 가자지구의 UNRWA 직원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요?
서구의 선전과 달리 하마스는 이슬람의 폭력성으로 탄생한 소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단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1987년에 주민들의 소망으로 만들어진 정치기구입니다. 당연히 수많은 UNRWA 직원들이 하마스를 지지하고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도와왔습니다. 이는 공공연하게 널리 알려졌던 사실이고요.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UNRWA의 직원 12명이 가담했다는 사실에 특별한 점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하마스가 행한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성공해서 이스라엘에 많은 민간인 피해자를 안겨주었다는 점이지요. 물론 이번 공격으로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1,200명으로, 지난 100여 년 간 이스라엘이 학살해 온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수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서구 사회에서 유럽계 인종의 목숨은 비유럽계와 경중이 같지 않습니다. 양자의 가치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자가 전자를 공격하는 것을 결단코 용서치 않으며, UNRWA를 빌미로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은 UNRWA의 직원 관리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기 전까지 분담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UNRWA가 어떤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까요? 직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하마스 지지자를 찾아내야 하나요? 아니면 이번에 이스라엘 정보부가 한 것처럼 직원 개개인의 통신망을 도청해야 하나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하마스로 기대되는 현실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직원으로 둔 UNRWA에는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당연히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하게 UNRWA에 대한 분담금 중단을 결의하고 나선 것은 각국이 공유하는 하나의 통일된 '선'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즉, 노예나 개가 주인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오랜 관념처럼, 이스라엘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비유럽계가 유럽계를 공격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서구 국가들이 정말로 분담금을 안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문제를 만들어낸 것도, 또 이를 지속시키는것도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구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면 이들의 악행을 오랫동안 참아온 아랍권과 무슬림권, 나아가 비서구권 전반의 거대한 분노를 야기하게 되고, 사회 내부적으로도 진실을 알고 있는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구 중심적 패권 질서가 붕괴되는 결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적 상황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서구사회가 돈을 지급할 테니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에 함구하라는 식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서구 국가들은 이런 관계를 잊지 말라는 경고로 UNRWA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추가 : EU가 UNRW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겨우 한 달만인데, "EU 주도 감사를 포함한 일련의 조건 이행에 동의"했기 때문이랍니다. 아무리 봐도 일종의 요식 행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