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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한잔 Aug 31. 2020

죽음에 관하여

죽음에 대한 고찰

영혼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영혼은 살아있는 무엇인가의 본질(Essence)이다.

예시를 한번 들어보자,

1) 눈의 본질은 보는것이다.

2) 나무의 본질은 광합성을 하는것이다.

3) 동물의 본질은 번식하는 것이다.

4) 사람의 본질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람의 학명은 Homo Sapiense 이다. 라틴으로, 두 발로 걷는 현명한 존재라는 뜻이다. 처음 Homo Sapiense라는 학명을 지은 사람은, 아마 인간의 현명함이 인간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Homo Sapiense라는 말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현명함인가?

딱히 그렇지는 않은것같다.

우리는 다른 많은것들을 "본질적으로" 좋아한다.


예를들어서,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한다. 명상이 하나의 예시이다. 명상은 여러가지 정의와 방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명상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격는다.


이 사실로 미루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본질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속적으로 무엇일가를 해야만 한다. 일어나면, 움직어야하고, 대화해야하고, 교류해야하고, 무엇인가를 "창작"해야한다. 아마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창작"일 수도 있겠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본질적인" 특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웃는것을 좋아하고, 재미있고 싶으며, 미래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가정적인 본질(Essence)들 중에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까?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William Jame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스스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것, 그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죽음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아주 가로고치는 벌레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인간 본질 중 하나 혹은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인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


우선 첫번째로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한 사람은 덴마크의 철학자인 Kierkegaard 였다.


Kierkegaard는 인간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서 불안의 학교("school of anxiety")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 말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불안이라는 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이해해야지만 우리가 개인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안중 가장 깊고도 가장 향이 짙은 불안은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죽음을 마음속 깊이 대면했을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사회적인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여기서 사회적인 구조물(Social construction)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사회의 편리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본질적이지 않은 개념을 말한다.


예를들어, 나는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나는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장 너그럽게 보아도, 나는 사회안에서 가능한한 역할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골랐을 뿐, 나는 가능한한 모든 가능성 중에서 내 역할과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보면, 우리는 일종의 거짓말을 살고있는샘이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이 거짓말을 내려놓아야한다. 


그리고 진정한 질문은 여기서 발원한다. 이러한 "거짓말"(사회적인 구조)를 내려놓으면, 나는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개인은 그 개인의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만드는 과정은 이와 같다. 뭐가 본질이고 뭐가 사회적인 구조물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본인을 재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은 어떠한 믿음을 필요로한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내가 파악한 본질은 사회적 구조물이 아니라 아주 본질적인 본질"이라는 믿음.


그리고 여기서 Kierkegaard는 흥미롭게도 기독교를 선택한다.

논리는 이와 같다:


"전지 전능을 제외한 모든 인간적인 논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사고에서 비롯하고, 그러하므로 본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종교와 전지전능함 아래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것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부정되어질 수 없는 본질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질문은

"종교에대한 믿음또한 죽음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회피하는 하나의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그리고 그 믿음과 가정적인 '본질' 또한 인간의 논리에서 나온 창조물 중 하나이므로, 자기모순적인 논리가 아닌가?"


이러한 몇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Kierkegaard는 인생을 사는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하였다.

바로 유명한 "Leap into the faith"이다. 한국말로는 "믿음으로의 도약" 정도일 수 있는데, 바로 어떠한 특정 믿음을 완벽하게 믿어버리고, 그것을 믿고 사는것이다.


삶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는 모르나, 무엇을 믿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두번째 죽음에 대한 비종교적 접근법은 독일의 철학자였던 Martin Heidegger였다.

그는 인간의 삶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도망칠때, 우리는 사회적 구조에 의지하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타인들과 무엇인가를 하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고, 돈을 벌고, 그 벌은 돈을 소비하고, 그 사회속에서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로 살아가면서 삶의 가짜 안정을 찾아간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사회 구성원이 가만히 앉아 어떠한 정말 영향력이 있는 생각을 하는것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가짜의 삶은 Heideggar(하이데거)가 봤을때, 본질적이지 않은 삶이었고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맞닥뜨리고 그 죽음에대한 불안을 넘어섬으로써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설명한 죽음에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조금더 완벽한 인간이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이 죽음은 먼 미래가 아니라 어느순간에도 찾아올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

2. 그리고 "존재의 죄책감(existential guilt)"을 마주하는것. 


존재의 죄책감(Existential guilt)는 상당히 재미있는 이론이다


우리는 무한대의 시간과 우주 속에서 무의미할정도로 짧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속에서 살다가는 탄소를 기반으로한 어느 한 숨을쉬는 화학적인 응고결집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아주 무의미할정도로 짧은 시간 이후에는 '나'라는 것은 사라진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의 선택을 제한하는 많은 요소들( 신체적인 결함, 뇌의 구조, 인종, 성별, 등등)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에 책임이 있으며 그러한 책임이 있는 선택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심지어, 우리는 언제나 항상 좋은 선택만을 만들지는 못할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지지 못한 삶의 죄책감"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우리가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가 만들 수 있었던 더 좋은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이다. 나는 저번 주말 술을 마시겠다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절제를 하지 못했고, 너무 놀던 흥에취한 나머지 다음날 일에 지장을 줄정도로 술을 마셔버렸고, 다음날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할 수 있었던 너무나도 많은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짧은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하지 못하는 선택을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계속해서 선택을 만들고, 이러한 선택중 많은 선택은 최선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최선이 아닌 선택 중 많은 선택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서 선택이 아니게 될 수 있었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우리의 삶의 질에 대한 책임감을 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예를들어서, 나는 지금 독일에서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다.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중산층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독일에서 뇌과학을 공부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었던, (아프리카에서 한부모 밑에서 자랐던, 남미에서 태어났던, 미국에서 태어났던), 항상 거기에는 사회적인 역사적인 상황에 속하지 않는 상황들이 존재한다. 내가 천년전에 어느 곳에서 태어났던간에 나는 지금과 똑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고, 나는 그 곳의 나의 상황아래에서 가능한 선택지들 중 나만의 선택을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이만큼 까지 생각할 수 있고 이만큼까지 스스로 느꼇다면 거기에 전환(transformation)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부터의 도피를 멈추고, 그 곳을 바라보면, 그 곳에는 가능성의 지평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평선은 우리를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에대한 신념과 서로에 대한 격려깊은 존중으로 가득찬 상태에 도달하게 하며,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삶을 떨쳐낼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모험으로 만든다.


이렇게 Heidegger는 종교에 기대지 않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마주하는것, 그리고 그을 넘어섬으로써 완벽한 인간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제시한다.


실제로, 우리의 많은 선택들과 결정들은 우리가 죽음이라는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내가 절대로 죽지않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선택을 만들고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러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고 인정한 다음 그를 반영하는 조금더 꽉차고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삶을 사는것이 중요하지 않나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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