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눈을 점령한 시대에, 다시 글에 기대어.
오늘 아침.
이불속 어디 있는지 모를 휴대폰이 이른 진동 하나를 떨고 지나갔다.
나의 삶처럼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방 안에 얇게 깔려 있었고, 이불 끝은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인 나와 함께 구겨져 있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켜자, 알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냥 앱 알람 한 통일뿐인데, 이상하게 숨이 잠깐 막혔다.
그리고.
“[출간한 책이 있으신가요?]”
“[글 발행 안내]”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혼자 읽은 알람이 나를 '바깥'으로 불러내는 것 같은 기분.
그렇게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고, 틈틈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던 나는 갑자기 '작가'가 되었다.
어디선가 무게 중심이 살짝 옮겨지는 느낌. 이 타이틀이 나에게 아직 낯설다는 사실만큼이나, 그 낯섦이 이상하게 좋았다.
그래서 오늘은, 형식적인 자기소개 대신 ‘내가’ 걸어왔던 ‘길’(생명과학)에 기대어, ‘내가’ 믿고 싶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내가’ 써나갈 이야기의 첫인사로 남겨 보려고 한다.
10대였던 나는 책벌레였다. 어떤 책이든 읽었고 어떤 책이든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특히 동물, 식물, 곤충 등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더 공부하고 알고 싶어서 생명과학을 전공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20대에 들어서면서 그 습관은 서서히 무너졌다.
PC와 인터넷, 휴대폰이라는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고 영상과 게임이 더 익숙해지고, 글이라는 형식은 점점 '길고 귀찮은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이제 40대에 들어선 지금.
나는 아직도 생명과학을 좋아한다. 누군가처럼 그것이 평생의 직업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냥 좋아하는 생명과학을 일상과 섞어 풀어보자는 마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그리고 20대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글을 써가며 알게 되었다.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글로 풀어 생명과학을 어렵게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생명과학이란 것은 멀리 있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고 경험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생명과학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글로서 전하고 싶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이토록 경이롭고 소중한 하루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브런치 첫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왔다.
생각해 보면, 글은 꽤 오래된 기술이다.
동굴벽화에서 시작해 돌과 점토판, 쐐기문자와 상형문자를 지나 종이와 책, 신문과 블로그, 그리고 지금의 브런치까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마음의 일부를 바깥에 옮겨 두는 방식을 찾아왔다.
말은 사라지지만, 기록은 남는다.
동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새는 울음으로 위험을 알리고, 고양이는 꼬리와 귀의 각도로 감정을 말한다. 벌은 춤으로 꽃의 위치를 전하고, 개미는 페로몬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그린다.
하지만 그 신호들은 대부분 지금을 살기 위한 것이다. ‘지금’ 먹기 위해서, ‘지금’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살기 위해서.
그들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말하지만, 어제의 상처받은 마음이나 내년을 걱정하는 두려움을 남겨 둘 방법은 없다.
인간은 그 마음을 글자로 바꿔 남겨둔 동물이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뇌 속의 전기신호를 기호라는 외부 세계로 꺼내 놓을 수 있는 존재.
천년 전 과거의 인물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고 그 능력이 바로 글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을 통해 일 년 후, 2년 후에 다른 사람과 교감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는 그 능력 때문에 아프고, 때로는 그 능력 덕분에 버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벌어지는 일을 떠올려 보면 흥미롭다.
눈으로 들어온 글자는 뇌의 뒤쪽에서 형태를 해석하고, 그다음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서 의미를 조립한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이해되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공감 회로가 뒤늦게 따라 반응한다.
마치 타인의 마음을 내 뇌 안에서 다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처럼.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도 내 일처럼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뜻밖에 서늘해지는 순간이 생긴다.
좋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의 작은 떨림은 뇌가 '이건 기억해 둘 만한 것'이라며 작게 신호를 보내는 일과 비슷하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잠시 빌려와 뇌 안에서 재생하고, 그 마음 한 방울로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의 영상은 너무 편리하다. 기술이 발달해서 4K, 8K 모니터와 영상이 등장했다.
누군가 이미 편집해 둔 장면과 속도, 구도, 색감이 눈앞에서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는 스크롤하고 재생하고 넘길 뿐. 뇌는 잠시 외장 모니터처럼 수동적으로 따라간다.
반대로 글자는 그저 압축된 신호일뿐이다.
그 신호의 집합인 ‘글’이라는 재생 버튼은 마음과 몸의 감각까지 다시 틀어주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뇌는 어떤 디스플레이보다도 고성능이고 고해상도이다. 4K, 8K 같은 해상도 제한도 없다.
실제로 없었던 장면도 만들 수 있고, 어린 시절의 방 냄새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빛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다.
"술 마신 다음날 회의실"이라는 한 줄만 읽어도 각자의 뇌 안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색감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고, 사람의 표정도 다르다.
그래서 하나의 글은 모두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다. 나에게 별 의미 없는 글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슴에 꽂히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나의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다른 이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가끔 생각한다. 글은 영상에 점령당한 내 눈과 뇌를 되찾아 오는 작업이라고.
내게는 가장 힘든 달이면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 달이다.
그리고 2026년 12월은 가장 많은 것을 이뤄낸 달로 기억되면 좋겠다.
그 사이의 1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하루에 한 단락씩이라도 써보는 일일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정확한 문장, 조금 더 솔직한 나의 마음을 남기는 일.
그래서 오늘, 브런치에 남기는 이 첫 글은 내게 '작가'라는 말이 처음으로 아주 조금 믿어지기 시작한 날의 기록이다.
이 글과 앞으로 써 내려갈 글들이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마음과 지식을 전해줄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