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우정은 어떻게 나를 성장시키는가
동급생(프레드 울만)
은퇴 이후, 70대가 되신 부모님은 종종 옛 친구를 만나신다. 최근엔 근 50년 전, 나와 내 동생, 그 집 자녀들과 놀았던 새내기 주부 시절 친구를 만나셨다. 젊었고, 아름다웠고, 가난했다. 밭과 저수지를 밀어버리고 아파트라는 것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시절, 지금은 자취도 찾을 수 없건만, 내 어린 시절은 늘 그 동네에 머물러 있다. 매일 해가 저물도록 놀았던 나는 물이 먹고 싶으면 우리 집 5층까지 올라가는 게 버거워 2층에 있는 이웃사촌 문을 두드렸다. "물 좀 주세요!!!" 그러면 곤하게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물을 주시곤 했었다. 미국에서 유학하시고, 한국 유명 공기업 사장까지 지내신 후 세종시에 머무르시는 그분들을 사진으로 뵈었다. 이제는 여유가 있고, 멋들어지시고, 여전히 유쾌한 함박웃음이다. 어쩌면 마지막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만남일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은 옛 친구를 만난 기쁨에 싱글벙글하셨다.
최근 중학생 시절, 동창들을 만났다. 각자의 삶에서 왜 이리도 여유가 없는 건지 1년에 1번 정도 만나게 된다. 옛 기억들을 들출 때마다 자책과 순진하기만 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당시엔 5명이 항상 붙어 다녔는데, 지금은 3명만 남았다. 서서히 이렇게 된 건 오해와 반목, 신뢰가 깨져버린 결과였다. 각자 대학으로 흩어질 때조차도 우린 얼싸안았고, 각자 직장에서 숨 가쁘게 고비를 넘기며 토로할 때도 함께였다. 먼저 금이 간 건 의약분업이었다. 한 명은 약사였고, 한 명은 간호사였다. 간호사였던 친구가 의약분업 찬성 서명지를 들고 회사에서 해오라고 했다며 불쑥 내민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양 단체의 이해관계에 대해 깊은 정보가 없었던 우리들은 친구 부탁에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서명했었다. 약사였던 친구는 기분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그 심정을 이해한다. 나와 말이 가장 통하기도 했고, 서로 제일 사이가 좋았던 배려심 많았던 친구는 어느 날부터 서서히 멀어져 갔고, 연락이 끊겼다. 그녀는 한의학까지 공부하여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갔다. 사실,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짐작만 할 뿐이다. 다시금 연락하여 관계를 이어가는 일조차 버거운 나이가 됐다.
40대가 되었더니 친구를 사귀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왜 어른들은 순수한 우정을 쌓는 것이 이리도 힘들까. 이미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버린 어른들은 자기 '성벽'이 강하여 쉽게 틈을 내주지 않는다. 나의 영역에 상대방을 들여놓을지 가늠한다. 종교, 배경, 지위, 물질, 교양, 자녀, 남편, 가치관, 생활 습관, 말투 등등등 모든 것을 잰다. 겉은 미소를 짓지만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언젠가부터 친구도 분류한다. 자녀 관계/ 같은 취미/ 일/ 종교/ 자기 계발/ 그리고 맘 터놓는 친구... 당연한 말이겠지만 친구에도 조건과 자격이 붙는다. 어린아이들은 다르다. 내 자녀들이 학교를 가기 시작하자, 동네 친구들을 알게 됐다.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하여 그저 놀 수 있으면 친구가 되었다. 10명이 넘는 아이들이 어울려 놀면 그렇게 시끄러울 수 없지만, 그저 웃고 떠드는 것만 봐도 순진무구함이 배겨 난다.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에로스는 벌거벗은 몸이 만나지만 우정은 벌거벗은 인격이 만난다"라고 했다
우정은 서로의 아름다움과 호감, 애정, 충성, 존경이 결합된 사랑의 모습이며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최대의 이타적 행위이다. 에로스(육체적 사랑)로 시작되든, 루두스, 스토르지, 마니아, 프라그마라고 불리는 감정과 이성으로 시작된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이 지속적이면서도 굳건한 신뢰의 바탕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필리아 즉, 우정의 모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들에게는 존재가 좋고 즐거우니까. 그들은 그 자체 좋은 것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즉 서로의 존재를 지각하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유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듯이 그렇게 또 친구에 대해 —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듯이 그렇게 친구의 존재도 선택되어야 한다. 혹은 거의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을 위하여 친구의 선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즐거움과 유덕하게 만드는 것이 우정, 우애라 한다. 이렇듯 우정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진득하게, 행복한 여정으로 안내한다. 비록 비극적으로 끝나는 우정이 된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서만큼은 빛나게 성장하는 '나'와 '너'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프레드 울만이 쓴 [동급생]은 '나를 알아준' 한 친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게르만 왕조의 충성스러운 최측근이자 독일 아리아족의 순수 혈통, 900년간 이어져 온 슈바벤 백작 가인 그라프 폰 호엔펠스와
유대 랍비 가문으로 200년 간 이곳 독일 작은 마을에서 터전을 잡은 한스 슈바르츠와의 첫 만남은 동경으로 시작한다. 서로 지적, 정서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목숨 걸만 한 친구라는 걸 알아본다. 수줍음은 의구심으로, 서서히 친밀함으로, 기쁨과 의의로 온통 그 시기를 채워버린다. 한스는 16살 때 만난 친구를 평생 잊지 못한다. 그가 없는 17년 동안 헛헛하고 메마르고 석고상 같은 삶을 산다. [동급생]의 원래 제목은 reunion(재회)다. 이제 30대, 성공가도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에 다시 만난 친구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사랑은 감정과 느낌의 상태를 넘어선 책임과 태도이다."우리 둘 모두 꿈꾸기를 그만두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너와 같이 보내는 한 시간 한 시간을 싸워야" 했던 호엔펠스의 묵직하고 서슬 퍼런 고함소리가 들린다
호엔펠스는 결국 생을 태워 한스에게 보답한다. 호엔펠스를 가장 큰 행복과 절망의 원천으로 삼았던 한스만큼이나 그 역시 삶의 이유이자 근원이 되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의 동행을 했고, 그렇게 재회한다.
다시금 우정을 생각한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아야겠구나. 아니, 어른이 돼서, 노년이 되면 더더욱 사랑에 힘써야겠구나. 사랑만이 죽음 앞에 피어나는 향기며, 편지며, 영원이다. 비록 결말이 비극이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후회없이 사랑해야지. 힘을 내서, 용기를 내서 더더욱 사랑의 길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