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느 기관에서 우리 가정의 개인 스토리를 촬영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먼저 1주일 안으로 1차 원고를 보내달라고 했다. 남편과 내 이야기를 따로 써서 A4 한 장 분량으로 제출했다. 5분 정도 분량이었으니 이 정도면 되겠거니 싶었다. 이후 연락은 없었지만 나는 계속 수정 작업을 하기도 하고, 마치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거울을 보며 하루에 1번 정도는 외우다시피 한 것 같다. 남편은 그 사이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원고 보낼 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최종 선별해서 보냈기 때문에 닥치게 되면 보고 읽으면 되겠지 뭐... 안심했다.
내보내는 날짜 한 주 전, 드디어 리허설 연락이 왔다. 코디네이터 작가님은 보내준 원고에 맞춰 질문을 구성했으며, 원고 내용이 너무 짧다고 했다. 내일 촬영을 할 예정인데, 코디네이터와 1시간 통화를 하면서 내가 생각한 콘셉트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5분이라는 분량을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토해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원고를 보지 말고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그때부터 소위 멘붕이 왔다. 갑자기 부담감이 확 들면서 이전에 제출한 원고를 모두 수정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촬영은 내일인데, 준비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다행히 코디네이터가 요구하는 의도와 콘셉트를 나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결과 중심이 아닌 에피소드, 내 감정과 고백이 담긴 마음의 목소리, 기관에 대한 감사내용 등.
5분의 영상 분량을 위해 2시간을 찍었다. 나는 꽤 만족스러웠다. 우선 촬영팀이 흡족해했고, 다시 찍자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찍고 남편이 그다음 순서라서 나는 촬영 장소에서 나왔다. 아이들을 단도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끝나고 남편의 후폭풍이 심했다. 같은 것을 3번 찍고, 갑자기 머릿속이 뱃짓장이 되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고, 지쳐서 횡설수설했다는 것이다. 주말 내내 이어진 남편의 시무룩함은 계속됐다. 왜 남편은 촬영 전에는 의기충천이었는데, 막상 촬영 후 이렇게 후회막급인 것일까.
우리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보았다.
충분한 연습과 준비를 하지 않아서다. 원고가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지 않은 채, 상황을 그림처럼 그려보지 않아서다.
자신의 이야기가 공개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모님이나 직장에 미칠 영향이 생각나서 말문이 막혔고,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확해지지 않으니 말과 글의 구조와 질서가 잡히지 않았고
누군가 코칭을 해줘야 하는데, 혼자 압박감에 시달려서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점검받지 못해서라고 했다.
처음부터 촬영팀의 의도와 콘셉트를 알았다면 아마 거기에 맞춰 준비했을 것이고, 이렇게 급박해서 당황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최근 지인이 유튜브 활동을 시작했다. 시작이라는 말은 변화를 말한다. '맵 하는 남자'란 필명으로 시작한 활동은 '맵'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스토리다. 유튜브를 하고 싶다고 2년 전부터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자신의 무기인 '맵'을 콘셉트 삼아 앞으로 시청자에게 어떤 의도와 만족감을 보여줄 것이다.
브런치 북 대상 프로젝트를 수상한 작가들의 글을 훑어봤다. 무엇보다 콘셉트가 놀라웠다. 그림을 해설하는 책은 시중에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2권의 책이 또 탄생했다. 이원율 작가의 [하룻밤 미술관]은 미술 전공자가 아닌 그림 애호가가 입문자에게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다. 태지원 작가의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은 심리와 일상을 풀어내면서 그림에 비추어 설명하고 어떤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에 대한 독특한 발상이다. 브런치 활동을 하면서 막히는 것은 브런치 북을 발행하려면 어느 정도 글이 쌓여야 하는데 적절한 콘셉트와 의도를 만들지 못해서다. 차별성과 고유함이 요구되는데, 책을 갖고 서평만 쓴다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같은 소재를 어떻게 독특하게 버무릴 것인가가 관건이다.
나 역시 독서 활동가로 나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 2년 정도는 재능 기부를 꾸준히 해왔다. 여러 형태의 독서모임이 있고, 유익하고 좋은 것도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접목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단순하게 잡았다. 책 읽는 부담은 덜하고, 책 나누기는 재미있게~. 학부모님들이 돈 내고시킨다면 어휘나 논술, 스피치, 국어 영역 등 많은 것을 가르쳐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내 수업에 있는 아이들 목표는 책 읽는 수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스스로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자율적으로 일정을 짜고, 해당되는 기관을 방문하고, 보고서도 써보고, 관련 사람들을 만나보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돈 내고하는 수업 벗어나기. 내겐 금전적 손해가 있겠지만 말이다. 콘셉트가 분명해지니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긴다.
어느 정도 준비해야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콘셉트와 의도가 분명해지면 자원이 희박하고, 앞길이 막막해도 도전할 준비가 됐다고 말하고 싶다. 콘셉트는 포지션이다.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을지 정해보는 것이다. 완벽한 준비란 없으며, 모든 정보를 알 수도 없다. 길을 가면서 보이는 수많은 샛길과 손길을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열매도 없다. 대신 나의 목표가 순수해지고 명확해질 때까지 심사숙고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