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 쓸까? 말까?

by 겨자씨앗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5인 가족이니 125만 원이라는 거금이 덜컥 주어졌다. 9월은 추석도 있으니 명절 보너스도 나온다. 코로나로 시간 수당이 없어진 마당에 한 달, 한 달 살아가는 내게 단비가 아닐 수 없다. 남편은 5년 가까이 쓴 핸드폰을 바꾸고 싶어했다. 친정어머니는 이 참에 이불 좀 바꾸란다. 나는 그저 쪼들리게 써온 생활비에 보태고 밀렸던 저축을 하고 싶다. 뻔하디 뻔한 월급쟁이에게 약간의 종잣돈이 주어지니 가계부를 써야 하나 머리를 치든다. 가계부는 쓰다 말다 했다. 위기의 신호가 오면 가계부를 어김없이 썼다.


카드값은 처음엔 고정 금액 30만 원에서 50만 원 정도를 웃돌았다. 공과금, 도시가스, 핸드폰, 인터넷 등 매월 나가는 비용을 걸어놓았다. 그러더니 갈수록 불더라. 쓴 건 없는 것 같은데 100만 원을 훌쩍 넘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고 카드값을 갚으면 또 카드를 쓰는 악순환이었다. 몇 달 동안 카드값이 150만 원 가까이 되자, 남편이 나의 가정 경영에 대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며 재차 설명을 요구했다. 내가 사치를 하나, 명품을 걸치나, 자기 계발에 쓴 것도 아니고, 5인 가족이 먹고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차근차근 말해줬다.

한마디 덧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럼 자기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느냐고? 생활을 꾸리려면 이 정도 필요한데 고민해본 적 있냐고 했더니

-알겠다. 내가 경제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럼, 자기가 해보라고 했다.


그날 밤, 경제권을 상실했다는 것이 마치 삶의 모든 에너지와 주도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원통하고 분하여 잠을 잘 수 없었다. 결혼해서 육아하며 사회생활이 단절되면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경영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자존심 상하고 이 집에서 나는 하녀일 뿐이라는 생각과 경제력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남편 역시 쥐꼬리만 한 한 달 용돈 받고 사는데, 너무 쉽게 돈을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물음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신문에 나오는 재테크 질문들은 소득이나 재산이 많고 맞벌이 부부가 하는 상담들이어서 내게 소용이 없었다. 요즘 N 잡러, 파이프라인이란 말처럼, 한 줄기에서 나오는 소득이 아닌 한 달 여러 번 받는 방법이 인기다. 어쩌랴. 내겐 부동산도, 주식도, 부업도 어느 것 하나 손대지 못하고 있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처지나 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가계부였다. 보너스 받은 전부를 카드값을 정산한 후, 새롭게 예산을 짜고, 그 안에 지출을 할 것. 카드를 쓰지 않을 것, 작은 것이라도 기록할 것을 세웠다. 달 정리하면 남편에게 회계 보고(?)를 했다.


친정어머니는 40년 가계부 삶을 살고 있다. 한 주 생활비 10만 원을 현금으로 가지고 다니시며 그 안에서 해결한다. 30년 전 가계부를 들춰보면 콩나물 200원, 시금치 150원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근근한 아버지 월급으로 지금까지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흔적이다. 그렇게 알뜰살뜰 자신에겐 아끼시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과감하게 쓰신다. 어머니를 따라 해 보려고 시도해봤으나, 웬걸, 한 주 10만 원은 택도 없거니와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다, 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아끼며 살고 싶지 않다, 지금은 근검절약이 아닌 투자와 소비를 해야 하는 시대라 생각하며 그만뒀다.


가계부를 쓰니, 확실히 규모를 알게 됐다. 1년 가까이 쓰고 엑셀로 정리해보니 수입과 지출 영역이 훤히 보인다. 지출할 때에도 한 주 써야 하는 금액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은 절제와 낭비를 줄여줬다. 카드값은 고정 금액만 나가니 빚으로 허덕일 이유가 없어졌다. 보험을 정리하고, 교육비를 줄이고, 외식을 덜 하게 됐다. 그러다 그만두게 된 계기는 늘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각 영역들이 머리에 들어오니 쓰는 게 귀찮아지고, 안 써도 규모가 뻔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에 매여 있는 것 같고, 구속과 억압받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살다가, 이번 재난지원금과 추석 명절금은 다시 가계부를 장만하게 했다. 지금의 규모에서 벗어난 이 기회를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다. 쓸 때는 물 쓰듯이 마음 놓고 쓰게 되는 것이 돈이다. 결코 공짜가 아닌 세금이며, 훗날 토해야 할 대가일 것이다. 가계부는 늘 현재 어느 지점인지를 이야기해준다. 이것이 내가 타인에게 손 내밀어야 할 때 가로막는 장벽이 아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도구로 잘 쓰기를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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