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다.
좋은 일은 큰 변화 없는 짧은 순간일 뿐이다
햇살이 이제 막 나온 연한 잎들을 간질거린다. 새하얀 벚꽃 잎이 꽃 눈길을 만들어 누구든 귀빈으로 모신다. 따스하고 기분 좋은 바람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눈꼬리가 부드러워진다.
사랑스럽고 껴안고 싶다.
이런 눈부신 아름다움이 시리고 아리고 애달플 수 있음을 알았다.
이젠 예전처럼 티 없는 기쁨이 어렵겠지.
슬픔에 잠겨 눈시울이 촉촉해져
보아도 괴롭고 안 보아도 괴롭다.
지난 월요일 친구 남편이 위암 4기 선고를 받았다.
우린 아이들을 같이 키웠다. 아들, 딸, 아들을 사이좋게 낳아
첫째와 둘째와 셋째끼리 죽이 잘 맞았고, 토요일마다 놀았고, 교외도 다녔고,
불쑥 찾아가 놀기도 했다.
아이들이 연결해준 친밀함이었다. 어릴 때 거의 매일 붙어 지내다가 아이들이 자라면 서서히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린 느지막이 친구가 됐다. 그녀는 정갈한 생활과 열정적이고 의욕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5시면 아이들과 어김없이 예배드렸고,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도 모범이 되는 분이었다. 내가 인생이나 신앙이나 선배였지만, 그녀의 열심에 한참 못 미쳤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나의 뇌는 어느 시각이 되면 이 분이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겠거니 작동했던 것 같다. 그분 자녀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니?"하고 물으면 "밤이고 아침이고 제가 눈뜨면 기도하고 있는 엄마요..." 했다.
위암 4기. 그게 어떤 상황인거지? 나는 네이버보다 브런치를 찾았다. 브런치엔 정보보다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투병 기록들이 죽 있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눈물이 마르지 못한 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 고난의 시작날인 고난주간이었다. 한 주전만 해도 이런 결과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술만 하면 될 거야. 젊은 사람인데 괜찮을 거예요.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마세요... 이런 말이 무색하게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이 소용 있을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선포하리로다.>
하나님께 빌고 빌었다.
제발 표적 검사하고 있는 약과 딱 맞게 해 주세요.
암의 진행이 멈춰지게 해 주세요.
모든 암이 소멸되게 해 주세요.
후유증 없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게 해 주세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바위 덩어리가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 같다.
손에 제대로 잡히는 일이 없다.
내가 이러한데 그 심정이 오죽할까. 어떻게 슬픔을 위로해야 하는 건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겪어보지 못한 상실을 내가 제대로 된 위로라도 할 수 있을까.
슬픔에 잠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꼈다.
이제 하루하루 일상이 어제도, 그제도 평범했었던 일상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얼마나 귀한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무와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얼마나 감사한지
예전과 다른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나는 다이어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시간을 붙잡아놓을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이젠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모든 인간은 시한부 인생이다. 언제 본향으로 부를지 모를 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천국이라는 고향이 존재한다.
어둠과 죽음과 죄악을 이기고 살아난 부활의 예수님은 실재다. 팩트이자 역사의 사실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모든 고난과 고통, 아픔, 슬픔을 이길 힘이 어디에서 솟아날까.
십자가와 부활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었다. 소망과 기쁨이 어디로부터 연유되는 것인지 이리 분명해진 적도 없다.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여전히 일상을 꼿꼿하게 지키고 있는 친구 부부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기도하고
조금이나마 격려를 하는 것뿐이다.
다시 웃고
다시 농담을 하고
잘 이기고 버티고 견뎌내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