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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자씨앗 Jun 17. 2022

소망교도소

영성일기  1화

오랫동안 브런치를 쉬었다. 그렇다고 글을 놓은 것은 아니지만 채널 성격 상 커밍아웃하는 것에 고심이 많았다.

브런치는 특정 종교에 대한 글을 쓰기가 꺼려지는 면이 있다.

글이란 것이 쓰는 사람의 모든 경험, 가치관, 세계관이 녹아져 있기 때문에 결국 정체성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식도 특별한 경험도 삶의 통찰력도 많지 않은데,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이 과연 타인에게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브런치는 섣불리 넋두리 같은 글을 쓸 수가 없다. 구독자 1명이 블로그 100명과 같다.  글을 쉬는 동안 구독해주신 분들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발행하지 않는 폐간된 잡지를 붙잡고 있어 주는 고마운 분들... 그래서 다시 쓰고 싶은데 결국 나는 영성일기라는 형태로 글을 잡았다.


부족한 믿음이지만 예수님 없는 삶은 내게 생각할 수가 없다. 나의 간절한 열망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하루니까.

그리하여 노골적으로 마음껏 하나님에 대한 글과 삶을 쓰기로 했다. 이곳에 비크리스천도 있을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이게 나이고, 요즘엔 글도 이런 것 밖에 써지지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과감하게 영성일기를 시작한다.




나들이를 가는 기분이었다. 같은 길이라도 사람에 따라 보이는 풀과 들판과 산이 전혀 다르겠지.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한가하고 고요한 여느 지역과 다를 바 없는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근 3년 만에 찾는 길이다. 더군다나 나는 오늘 이곳에 올 생각조차 못했다. 홈스쿨 수업이 있어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다음 주 수업할 선생님이 먼저 바꿔달라고 제안했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선교중창단을 섬기고 있다. 교회 안10여 개가 넘는 중창단 중 이 길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청년 땐 열심히 자발적으로 하던 봉사도 지금은 잘 나서지도 않고, 시도하는 것이 힘들다. 처음엔 피아노 반주가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 계기였는데, 반주자가 이리저리 빠지게 되니 찬양으로 섬기게 되었다. 선교중창단은 교회 내부엔 서지 않는다. 주로 교도소, 구치소, 장애시설, 중대형 병원, 기동대 같이 지역 사회에 나가 찬양한다. 교회의 얼굴이자, 그리스도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오늘은 여주에 위치한 소망교도소에 간다. 갇힌 자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은 묘하다. 왠지 꺼림칙하고, 사회 구성원이 아닌 것 같은, 남의 나라 사람들처럼 여겨지는... 처음엔 그랬다. 동부구치소에 갔을 때 공기마저도 서늘했다. 조명도 어두워보였고, 교도관 얼굴도 엄숙했고, 재소자들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형기 확정 전 사람들의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이 얼굴에 보인다. 정면으로 마주 앉아 서로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생각과 무표정한 얼굴들을 보며 잠시 기도한다. 저들의 영혼을 살펴주시길 바란다.



소망교도소는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하늘색 옷을 입고 만면에 웃음을 띤 안내원들이 우리를 안내한다. 교도관인가 했더니 아니다. 마치 청년대학생들의  집회에 온 것처럼 앞에는 전자기타, 드럼, 피아노 등 악기 연주자와 인도자 옆에 서 있는 찬양팀은 모두 재소자들이다. 뜨겁고 열정적인 인도자의 진행에 맞춰 찬양 소리가 우렁차다. 교도소에 온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예배 자리에 온 것 같다. 나는 이곳의 삶을 전혀 모른다. 우리는 전혀 공유한 것이 없다. 다만 우린 영적인 존재들이고, 우린 모두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선 똑같다. 전엔 이런 곳은 전혀 와서는 안 되는 곳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이곳에 오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금 소망과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뿐임을 안다. 감옥 밖에서 더 강퍅하고 은밀하고 악한 죄를 얼마나 많이 짓고 있는가 말이다.



재소자 한 형제의 기도가 가슴을 울린다. 그는 전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괴로움, 원망, 분노, 한 가정을 파괴하는 자였지만 예수님을 알고, 이곳에서 지내면서 나 보다 남을 더 보게 되었고, 눈이 달라졌다는 고백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빌며, 피해를 입힌 자들에게 축복을 간구하는 자가 되었다. 무엇이 사람을 달라지게 만드는가. 지식, 물질, 배경, 부모, 결심, 수행, 독거, 친구... 궁극적이고도 근원적인 변화는 외부가 아니다. 물론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내부다. 영혼이다. 이 부분이 바뀌지 않으면 잠시 잠깐일 뿐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내부에 있다. 내 존재가 동물과 같지 않고, 영혼이 담긴 그릇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사랑이 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나의 근원적인 자존감과, 자신감이 회복된다. 복음은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타인을 연민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내가 착해서, 감정이 좋은 상태라서, 원래 그런 기질이 많아서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넘치고 흘러서, 감복하고 충만해서, 퍼주어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들과 나의 하루는 많이 다르지만 같은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 18).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영원의 눈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을 갖게 하신다. 우리의 겉사람은 매일 낡아지고 퇴보하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 오직 예수님만이 매일 새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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