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자씨앗 Jun 19. 2022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영성일기 2회

성경을 읽다 보면 정말 지키기 어렵고 아예 불가능해 보이는 듯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 살라고? 어떻게?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부담을 넘어 무심하게 지나치는 말씀들이다.


한 번은 아들이 친구와 싸워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다. 처음엔 말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상대방이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자신도 때려주었다는 것이다. 코피를 터뜨린 상대방은 의기양양해하며 자신이 선점했다는 자세였나 보다. 아들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싸움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떡진 아들에게 "주님이 원수도 사랑하시라고 했잖니. 우리 주님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다. 잘 참았다. 그만하길 다행이다. 웬만하면 싸우지 않는 것이 좋지. 처음부터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남자는 서열싸움이야! 네가 지면 앞으로 우습게 보니깐 싸울 때는 확실하게 상대방을 패줘라. 아예 넘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대들지 않는다."라고도 말해줄 수도 없었다.


그저 피를 닦아주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듣고 안아주기만 했다. 앞으로 매일 보는 그 친구를 어떻게 대할지를 나눴다. 속이 상했다. 당장 그 친구 부모를 찾아갈까? 요즘은 아이들끼리 다투는 작은 일에도 부모들이 뭐라 하던데. 코뼈라도 부러졌으면 당장 찾아가려 했지만 주님이 마음을 평온케 하시고, 그 친구 가정을 보듬으라는 마음을 주셨다.


훗날, 그 친구가 여자 아이와 투닥거리는 일이 발생했고, 그 여자아이의 부모가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왔다. 자기 딸을 친 이 친구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많이 분개하고 흥분된 상태로 남편은 딸이 당한 소식에 직장도 조퇴하고 바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나는 중간에서 여자아이 어머니와 남자아이 어머니 사이에서 중재를 하고, 함께 찾아가서 노여움을 누그러뜨렸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일단락되었다.


여자아이 어머니와 남자아이 어머니는 내게 깍듯이 대한다. 아들과 싸웠던 그 친구는 인사를 매우 잘한다. 또한 잘 논다. 왼뺨까지 대진 않았지만 아들이 멈춘 그 상황에서 주님은 모든 상황을 매만지셨다. 아들아, 너는 예수님 아들이야. 네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었으면 좋겠다.



요즘, 지인들에게 들려오는 소식들로 가슴이 내려앉을 때가 많았다.


매주 인사하며 친하게 오고 갔던 지인의 위암 4기 소식.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고등학교 자퇴한 000.

정신질환으로 갇힌 000.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지인의 자녀들.

뇌전증으로 학교에서 픽픽 쓰러지는 000.

작년부터 10개월 동안 원인도 모른 채 설사가 그치지 않는 000.

한달한달 근근이 이어가는 사업장.

신장 수술 후 신장 여과 수치가 계속 떨어져 염려스러운 아버지.

황반 모세혈관확장증 진단을 받고 시력이 점점 떨어질 거라는 나.


폭풍 같은 쓰나미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붙들고 믿음과 소망으로 지내는 분들을 보며

버티고 견디는 힘을 주시는 건 오직 말씀과 기도뿐임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이런 와중에 서로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나누게 됐다. 그분이 먼저 드러내기 쉽지 않은 깊은 고민과 상황을 먼저 나누어주었다. 사적인 삶에서 공적 삶으로 보여주는 내밀한 고백들, 주님께 토로하며 깊은 절망과 어둠 가운데서도 한줄기 빛을 보는 시선, 막힌 담을 뛰어넘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눈물로 품으며 기도하는 글들에 나는 이 말씀이 생각났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떻게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어? 이건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지. 오지에서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물질적으로 잘 챙겨주는 사람,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선택 구절. 나는 이런 경험도 느낌도 마음도 가져본 적 없다고 치부했던 문장. 평생 나는 이렇게까지 사랑하며 살기는 힘들지 않을까 했던 한 마디.


그분의 영성일기엔 이렇게 씌어 있다.

"나의 입술에 하나님의 자녀들 이름을 넣어주며, 날마다 이 영혼을 위해 울고 계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의 마음이 전해졌다. 마음이 아파 엉엉 울면서 기도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영혼을 향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소망의 증거이기에."


한 영혼을 품고 간절하게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모세가 사십 주 사십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며 생명책에 내 이름을 지워버려도 좋으니 제발 이 백성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한 것.(출 32:32)

바울이 나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형제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롬 9:3)라며 간청한 것.

정말 그들이 하나님과 단절되길 바랬겠는가. 너무나 간절히 그 영혼을 원하고 사모하고 애끓는 심정이었기에 이러한 고백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우리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도 한 영혼을 이런 마음으로 품길 원하는 것이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원수까지도 기도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

내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망교도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