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18
이제 여행의 후반부로 들어선다. JR패스 7일권을 개시하는 날이다. 전날 버스 시간표를 체크한 후 여유 있게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키넷)를 통해 예약을 해두었다.
역에 도착해 미리 예약한 표를 발권하려 했으나, 티켓 판매기의 스크린을 아무리 뜯어봐도 그 메뉴를 찾을 수 없었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패스를 발급받으며 도야역에서 개시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직원분이 즉각적으로 "예스!"라고 답했건만.
어리벙벙해 있는 내 곁으로 영어 통역 가능 뱃지를 단 자원봉사자께서 다가오셨다. 예약 확인 이메일을 보여드렸지만, 그분도 발권 절차는 잘 모르시는 듯했다. 나를 창구로 데려가 역무원께 상황을 전해주셨는데, 대충 이해하기로는 도야역에서는 온라인 예약 티켓 발권이 불가능하다는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더니 역무원이 "오늘만 특별히"라는 느낌으로 내가 예약해둔 표들을 주르르 뽑아주었다? 일단은 감사하며 표를 받아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경험하기로는, 일본 기차 이용에 알게 모르게 제약 사항이 많지만 역 창구에 직접 가면 웬만한 건 다 해결이 된다.
한 움큼의 표를 소중히 챙긴 후 대기석에 앉으니, 아까부터 흘러나오던 안내 방송이 그제야 귀에 들어온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연달아 이어지는 방송은 '사슴과의 접촉'으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표현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조금만 검색해 보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뭐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간 영화 속 한국어 표현도 이상할 때가 많으니 이 정도는 애교겠지만, '사슴과의 접촉'이라니.
어차피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비었기에 지연은 상관없었다. 아까 진땀을 흘린 나를 위해 남편이 비타민 충전이라도 하라며 자판기에서 뽑아준 레몬 음료를 홀짝이며, 기차에 접촉한 사슴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그사이 역을 둘러본 남편이 에키벤을 팔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보니 매장도 아니고 그냥 테이블 하나를 펴둔 채 팔고 있었다. 유부초밥을 파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웬만한 동네엔 저마다 자랑하는 요리가 있던데, 도야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향토 요리가 없나 싶었다.
에키벤은 '역(에키)'과 '도시락(벤토)'의 줄임말이다. 일본에서 처음 기차를 탔을 때 사람들이 차내에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약간 놀랐던 적이 있다. 일본 여행 중 인상 깊었던 것이 기차나 전철에서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 문화였는데(안내 방송으로 끊임없이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한다. 어휴, 그것도 시끄럽...), 소음에는 민감하면서 냄새에는 참 관대하구나 싶어서였다. 이번 여행 중 남편도 식당의 환기 상태나 냄새에 대해 자주 투덜대곤 했는데, 조용한 기차 안에서 간장 냄새를 풍기며 밥을 먹는 건 민폐로 생각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한편, 에키벤은 일본의 마케팅 능력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정성껏 만들었다 해도 미리 상자에 넣어 냉장 보관했다 파는 밥인데, 맛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나. 그럼에도 이를 지역 특산물과 결합해 하나의 상품으로 정착시킨 점이 놀랍다. (에키밴 만화도 있음). 이번 여행에서 기차를 꽤 탔지만 우리 부부는 에키벤을 먹지 않았는데, 차가운 도시락보다는 따뜻하게 갓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이건 내 이유였고, 아침마다 편의점 삼각김밥을 주야장천 사 먹던 남편의 속마음은 잘 모르겠네?)
약 한 시간의 지연 끝에 기차가 도착했고, 좀 헷갈리는 승강장 표시를 거듭 확인하며 승차해 자리에 앉았다. 도야에서 하코다테까지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JR패스는 패스권 한 장과 좌석 예약권 한 장을 겹쳐 개찰구에 넣어야 한다. 탈 때는 두 장이 다시 나오지만, 내릴 때는 좌석권은 기계 속으로 사라지고 패스만 다시 나온다. 이런 자동 개찰 시스템이 없는 작은 역에서는 역무원이 직접 확인한 뒤 패스만 돌려준다.
역에 도착하니 한자로 '函館'라고 쓰여 있었다. 첫자가 무슨 글자인지 찾아보니 '상자 함(函)' 자였다. 원래는 '상자 모양의 집'이라는 뜻 (외국 공관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고)의 '箱館'이라고 썼으나, 1869년(메이지 2년)에 현재의 한자인 '函館'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함관'이라 읽지만, 일본어로는 '하코다테'라고 발음한다.
函자가 참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좀 찾아보니 모양 만이 아니었다. 원래 사용하던 '箱(상자 상)'은 대나무로 만든 일반적인 상자를 뜻하는 흔한 글자지만, 메이지 정부가 하코다테를 홋카이도 통치의 핵심 거점으로 삼으려 하면서 도시의 위상에 걸맞게 더 세련되고 권위 있는 한자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函(함 함)'은 귀한 물건을 담는 함을 의미하여 당시 기준으로 훨씬 격식 있고 고풍스러운 글자였다고. 또 글자 변경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1869년은 일본 내전인 '하코다테 전쟁(箱館戦争)'이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난 해다. 메이지 정부는 구막부 세력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사용했던 이름인 '箱'을 버리고, 구세대의 색채를 지우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발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인 '函'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했다고. 현재는 역사적 사건을 지칭할 때만 '箱'을 쓰고 (하코다테 전쟁(箱館戦争)처럼), 현대 도시를 말할 때는 '函'을 쓰는 것으로 명확히 구분한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와 하코다테 필름커미션 사이트 외 다수의 사이트들 참조.)
이번에도 JR Inn에 여장을 풀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위치, 시설 등에서 흠잡을 데 없는 호텔이다. 특히 이번 하코다테점은 역과 같은 건물에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승강장에서 로비로 나와 다시 유리문 하나만 통과하면 바로 호텔로 연결된다.
아담한 방 창밖으로 아침 시장과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뷰가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는 2박을 예정하고 있어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짐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우선 창밖으로 보이던 아침 시장 쪽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카이센동을 파는 가게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미 대부분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꽤 차가웠다.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날 때쯤, 남편이 홋카이도 3대 라멘 중 하나라는 '아지사이 라멘'이 근처에 있다고 했다.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했다. (다음 날 지나가며 보니 줄이 매우 길었다. 전날은 타이밍이 잘 맞았나 보다. )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방식이고, 유명하다는 시오(소금)라멘과 볶음밥, 그리고 생맥주를 주문했다.
남편은 글에 '짜다'고 적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꽤 괜찮았다. 맥주와 곁들여서인지 유독 짰다는 기억은 없다.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국물과 가는 면의 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시오라멘 둘, 볶음밥 하나 그리고 생맥주 두 잔 해서 4,530엔.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찬 바람을 뚫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건물이 고풍스러운 수제 맥주집을 발견했지만 배가 불러 다음을 기약했다.
매일 참새 방앗간처럼 빼먹지 않는 약국과 편의점을 찍고 (성게맛과 오징어맛의 센베이를 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온천욕. 남편은 캔맥주를 한 잔 더 하는 듯했지만, 나는 온천 덕분인지 이내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