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하코다테로 간다

먹는 것 외엔 딱히 다른 계획 없는 여행 시작 (2025년 10월 7일)

by 그래도 캠핑

버스는 꼬부랑꼬부랑 시골길을 돌아 돌아 역에 도착했다. 20분 정도 걸렸나?


도야 역




하코다테로 향하는 오늘부터는 JR 홋카이도 7일 패스를 쓰게 된다. 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다음날, 공항 역 카운터에서 이 7일 패스를 발권받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일정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아서 기차표를 미리 예매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당장 좀 전까지 몇 시 버스를 탈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느니 어쩌면 이렇게 P의 여행 분위기로 가는 게 정답이었을 텐데..


어라. 자동발권기 앞에 선 아내가 쩔쩔 매고 있다.


자동발권기 앞에는 영어 자원봉사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영어를 잘하실 뿐이지 발권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 해결 능력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럴 때는 사공이 많으면 통역하는 사람만 더욱 힘들어지는 걸 알기에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다. 다음 열차가 12시 51분이니까 아직 시간이 철철 남기도하고. 필요하면 부르겄지.. 하면서. 시골 역답게 역사에는 매점 같은 것도 하나 없고 자판기만 하나 덩그렁히. 그리고 그 옆 교류센터라고 불리는 공간에서는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무슨 좌판을 열어 전자레인지를 두고 에키벤 (駅弁 열차 안에서 먹도록 고안되어 기차역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을 팔고 있었다.


결국 개찰구 옆 카운터의 역무원에게까지 가서 알아보니 도야 역처럼 작은 역에서는 7일 패스의 좌석 예약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번만 특별히 해주겠다고 선심 쓰듯이 말하면서, 삿포로 역처럼 큰 역에서 미리 하고 왔어야 했다는 타박도 잊지 않는다. 결국 앞으로 남은 일정 모든 기차 티켓을 예약했는데, 오늘 하코다테로 타고 갈 특급 북두 열차도 전석이 지정석으로 운행되고 있기에, 홋카이도 기차여행에 있어서 좌석 예약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도야 역은 대합실도 작지만 열차를 탑승하는 플랫폼도 무척 좁아서 열차 도착 10분 전까지는 개찰구를 닫아두고 있었다. 그럼 사실... 역무원이 그렇게까지 바쁠 것 같지는 않은데.. 뭘 그리 야단까지 치는 건지... 어쩌면 캐나다 사람들의 유연성에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게 되었나? 아내의 티켓 예약을 도와주던 역무원은 카운터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없어지자 슬그머니 자리를 비우고는 뒤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며 퍼팅 연습을 한다. 타카쿠라 켄이 나왔던 영화 <철도원>에서의 헌신적인 역무원은 역시 그냥 영화 속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한가했던 역사 대합실



30분 동안의 실랑이를 마치고 표를 다 예약하고 나서, 자판기 주스를 하나 뽑아 마시면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온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 에 한국말까지 방송이 나온다. 12시 51분 도착예정이었던 하코다테 행 열차가 사슴과의 접촉으로 지연되고 있다도 한다. 사슴과의 접촉이라고? 특급열차가 사슴을 들이받을 걸 참 고상하게 표현하는구나. 급할 것 없다 어차피 하코다테의 숙소도 오후 3시나 되어야 체크인을 받기 시작할 테니까.





플랫폼 바닥에 색깔 딱지가 붙어있는 걸 보시라



일본의 다른 역들도 이런 지는 모르겠으나, 홋카이도의 JR 역들은 어쩌면 이렇게 표지판이 많은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숫자도 난립하고 A, B, C, D 문자들도 어지럽다. 거기에 색깔도 있고 동물들의 모습도 모인다. 이게 다 무슨 뜻인지. 열차를 운행하는 사람들이나 역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표시들이겠지만 열차를 탑승하는 승객 입장에서는 몇 호차 탑승구역이 어디인지만 알면 될 것 같은데. 플랫폼 기둥에 붙은 숫자는 차량번호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색깔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나마 이곳 도야 역에서는 그 색깔(및 알파벳) 표시를 대합실 스크린에서 미리 안내되고 있었다. A와 B 구역은 1호차, C 구역은 2호차, D 구역은 3호차.. 이런 식으로. 그 와중에 D, F, G가 없는 게 함정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결국 타는구나. 얼렁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다. 가만 보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일이 음식을 소화시키는 일이었던 듯도 싶다. 먹고 먹고 또 먹으니 체력이 버틸 수가 없었다...라는 철딱서니 없는 투정을 부려보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는데, 잠시 수면을 취하다 보니 열차의 진동 때문에 몸이 휘청휘청한다. 원래 기차 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흔들리는 거였나? 이 정도면 월미도에서 타가다 대신 운행해도 되겠는데.. 아이고 이건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어쩔 수 없다. 짬짬이 여행 기록이라도 남겨야지...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하코다테에 이렇게 금방 온다고?


자 이제,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게 문제다. JR 패스 이용자는 패스와 좌석지정권을 겹쳐서 개찰구에 넣어야 한다는데, 과연 좌석지정권만 삼키고 패스는 다시 나올 것인가 궁금했다. 만일 그렇게 두 티켓이 갈 길을 달리한다면 그 메커니즘도 심히 궁금했다. 그리고 이 커다란 짐과 함께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시간이나 공간이 부여되는 지도 걱정이 되었는데, 마침 개찰구 앞에 역무원 한 명이 서있다. 아까 무척 한가해 보였던 도야 역의 역무원을 생각하니, 어쩌다 이 분은 이렇게 바쁜 역에 배치가 되었는지도 좀 궁금해졌지만, 인상 좋아 보였던 역무원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고 탑승권과 패스를 같이 넣었더니.... 삑 하면서 티켓들은 다시 뱉어내졌다.


아이고, 얼마나 다행인가. 이럴 때 바로 코 앞에 역무원이 있다니. 비단 여행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는 경우는 무궁무진한데, 그때마다 가장 힘든 일은 그 일을 같이 해결해 줄 사람을 찾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바로 눈앞에 떡하니 서 계시다니... 아닌가? 경험 많은 역무원 입장에서는 멀리서 걸어오는 내 모습만 보더라도, 저 인간 뭔가 사고 치겠구나.. 하는 삘이 왔던 건가? 아무튼 고맙다. 역무원이 직접 다시 한번 시도해 보지만 표들은 다시 튀어나오고, 그러더니 내게 다른 문을 열어주고는 내 표에다가 빨간 도장을 하나 찍어준다. 엥? 이게 뭐야? 와.. 이 인간들도 정말 오늘만 대충대충 수습하면서 사는구나. 이 표가 언젠가 또 한 번 사고를 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바빠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당장 표를 바꿔주든지 해결해 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뭐 한 마디 더 얹어서 물어보기가 힘들었다. 이 사람이 영어를 할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고 진 짐을 다 내리고 다시 폰을 꺼내 파파고 앱을 열기에는 이미 지친 것. 뭐, 어떻게 되겠지. 문제 생기면 그때 가서 해결하기로. 에라 그나마 표에 도장을 찍고 나서 바로 손으로 만져서 빨간색 잉크가 다 번졌다.



빨간 도장이 찍힌 JR 홋카이도 7일 패스와 하코다테에서 히가시무론란으로 이동했을 때 사용한 좌석지정권





이번 숙소 역시 JR Inn인데 이전에 묵었던 삿포로 미나미 지점과는 달리 역과 바로 붙어 있다. 덕분에 크게 걷지 않고 그냥 역사를 빠져나와 체크인 완료. 하코다테는 오징어를 포함한 각종 해산물로 유명한데, 역사 내에서도 다양한 특산품 음식들과 에키벤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JR Inn 하코다테의 세탁장에는 만화 <에키벤>도 있구나 (삿포로 미나미 지점에는 만화 <은수저>가, 이후에 가게 되는, 무로란 온천물을 사용하는 걸로 유명한 히가시 무로란 Dormy Inn의 세탁장에는 만화 <테르마이로마이>가 있었다. 물론 만화 <골든 카무이>는 이번 홋카이도 여행에서 묵었던 모든 호텔에 다 있었다).




나름 항구뷰를 가졌던 아담한 호텔 방


체크인하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시내로 나서본다. 역 앞에는 아사이치 히로바 (朝市ひろば)라고 하는 새벽시장이 있다. 원래 5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하는 도매시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자갈치 시장과 같은 시스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영업시간은 5시부터 2시. 그래서 유명한 히로바 시장의 카이센동 (해산물 덮밥)을 먹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 아니 몇 집 아직 영업을 하는 곳이 보이긴 했어도 대부분 닫았다. 심지어 시내에 있는 유명 식당들은 대부분 금요일까지 닫는 걸로 되어 있었고, 유명 이자카야는 보통 5시 이후에 연다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대도시에서 평일 오후 3시란 웬만한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해피아워가 되겠지만 신선한 해산물의 도시 하코다테에서는 얄짤없었다. 결국 찬 바람을 맞아가면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아내는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 (金森赤レンガ倉庫)'가 있는 베이 에이리어를 좀 걷다 보니 이 지역 유명 라면 체인점이 열려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름하여 '멘츄보 아지사이 (麺厨房 あじさい)'. 시오 라멘 전문점이다.










홋카이도는 혼슈나 큐슈에 비해 워낙 추운 도시이다 보니까 국물 요리가 발달한 걸로 유명하다. 삿포로 수프카레도 일종의 국물요리 되시겠다. 라면 역시 삿포로에는 미소 라멘과 버터콘 미소 라멘이, 아사히카와에는 소유 라멘이, 하코다테에는 시오 라멘이 독자적으로 각각 발달해 있다. 애초에 하코다테는 일본 최초 개항도시 중 하나였고,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융합된 채 상업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중 하나가 닭뼈육수에 소금 간을 한 중국식 국수요리인 '난킹소바'였던 것. 그리고 이게 지금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소금맛 시오 라멘으로 자리 잡아온 것이다. 지역에서나 여행객들에게 평양냉면처럼 깔끔하고 담백한 국물로 유명한 하코다테 시오 라멘 장인인 '지요켄 (ラーメン 滋養軒)'은 휴일이 겹쳐 아쉽게도 이번에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좀 더 대중적인 입맛으로 시오 라멘의 맛을 널린 알린 지역 라면 재벌 멘츄보 아지사이는 '베이 에이리어 미식 구락부'에도 지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오오오오. 드디어 이렇게 유명 맛집에도 한 번 오게 되는구나. 그것도 본고장 라면 재벌집에. 오호호호. 이런 곳에서는 보통 군더더기 없는 가장 기본적인 메뉴를 주문해야지, 그래도 그전에 나마비루 일 잔이죠, 하며 시오 라멘과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국물 한 숟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우 짜.



와아. 국물뿐 아니라, 국수도, 멘마도 소금물에서 갓 꺼낸 것처럼. 차슈도 뻑뻑한 편이고...






아니, 이것들이 외국인 관광객 엿 먹으라고 소금을 갖다 부었나?? 싶을 정도로 짰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 제법 배가 고픈 상태였음에도 국물을 다 비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볶음밥은 매우 기본을 잘 지킨,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불향도 잘 입혀진 밥이었기에, 저 시오 라멘 역시 나름 공들여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식당 안내에 의하면 홋카이도 산 최고급 다시마와 돼지뼈, 닭뼈 그리고 천연 암염으로 베이스로 만든 육수라고 하는데...., 어우 짜. 애꿎은 맥주만 계속 들이켜고.



짠 국물을 중화시키기 위해 후추를 뿌려 먹는 센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테이블마다 아이누 민족의 전통 향신료를 재해석했다는 에조후추, 'GS 라멘코쇼'를 비치해 두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오뚜기 순후추 맛. 가뜩이나 짠 라면인데. 제조사에 의하면 흑후추, 백후추와 함께 양파 가루, 마늘 가루를 섞어서 만들어 라면 풍미를 몇 곱절 살려주는 조미료라고 하는데 이곳 외 다른 라면 가게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후에 삿포로에 있는 만두 전문점에서 한 번 더 봤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특이했던 건 '오토시 (お通し, 일종의 자릿세 개념의 기본 안주)'가 아닌 서비스 안주가 있었다는 것. 입구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라 따로 오토시 값을 내지 않은 게 확실한데, 맥주와 같이 안주가 나와서 살짝 놀랐던 기억이다.


기대가 컸던 건지, 아니면 그동안 밴쿠버에서 돈코츠 계열의 고급 라면집만 다니다 보니까 입맛만 높아져서 그랬던 건지.. 뭔가 좀 아쉬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선다. 그래도 따뜻한 걸 먹었더니 바닷가 칼바람도 견딜만하다. 그래, 이렇게라도 옷에 밴 음식냄새를 다 날려버리고 숙소로 가야지. 조금 걸어 내려오니, 아아아아아. 이런. 수제 맥주홀이 있었네. 근데 도무지 뭔가를 더 먹을 수 있는 위장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마이크로 부루어리 들은 밴쿠버에도 무척 많았기에 크게 아쉬운 건 없기도 했고, 자세히 보니 덩치만 큰 전형적인 관광지 식당 같기도 하네...라는 등 여우가 신포도라고 생각하고 체념하듯 돌아선다.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약국에 들러 페브리즈를 한 통 집는다. 이제부턴 음식 냄새 걱정 없이 아무거나 죄다 먹어주리.



수제 맥주라더니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