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의 이유 - 히가시 무로란

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22



조용한 폭풍이 지나간 후, 호텔 라운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짐을 찾아 역으로 향했다. 이전 글에 썼듯 숙소와 역이 같은 건물에 있어 매우 편리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가방 걸이, 테이블, 컵 홀더 등이 잘 갖춰져 있어서 쾌적했다. 삿포로에서 동생이 선물 해 준 텀블러는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하코다테로 향할 때 바다를 보며 왔듯, 돌아가는 길 역시 기차가 해안선을 끼고 달린다. 물멍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진행 방향의 오른쪽 좌석에 앉기를 추천한다. 여전히 회복 중인 남편은 물멍이고 뭐고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었지만.




이런 풍경이 계속 펼쳐집니다.










굳이 무로란을 일정에 포함한 이유는 가는 길의 딱 중간이기도 했고, 맛집이 많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지가 아닌 소도시를 들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 여행객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호텔 도미인을 적당한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큰 도시 도미인은 꽤 비싼 편.)




무로란은 바닷가의 무로란 지역과 생활지구인 히가시무로란으로 나뉜다. 우리의 숙소가 있는 JR역은 히가시무로란역이었다. (무로란으로 가려면 기차를 갈아타야 함.) 오후 5시가 넘어 도착하니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일단 체크인을 하고 짐만 던져둔 채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남편도 컨디션이 좀 돌아온 모양이다.



메모해 둔 역 주변 이자카야를 찾아갔으나 자리가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가 본 곳은 중식당이었다. 재작년 여행 때 달고 짠 일본음식에 지쳐갈 무렵, 우연히 찾아간 동네 마파두부 집에서 느끼함을 씻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ごはん(고항 - 밥/식사류)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 허허허. 우리가 잘 못 알아들은 건가? 아직 이른 저녁시간인데.



이런 식으로 몇 군데에서 연달아 거절을 당하니 상당히 의기소침해졌다. 번화가가 아니라 식당 간 거리도 멀었고 동네는 무척 캄캄했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떠 있었음에도 주변은 어두웠다.



이쯤 되니 모든 게 귀찮아졌다. 숙소 바로 옆, 이자카야인지 식당인지 모를 곳의 문을 열어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분이 버선발로 마중하듯 맞아주신다. 꽤 큰 규모인데 안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혼밥 하는 손님만 둘. 좋은 징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점엔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했다.


일단 생맥주 한 잔과 메뉴판에서 몇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오, 그런데 나온 맥주잔이 꽁꽁 얼어 있어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일단 맥주를 들이켰다. 연이은 거절에 삐쳐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겨울로 접어들며 뜨거운 차를 줄곧 마셔댄 덕인지 위가 안 좋아져 금주중인데, 오랜만에 맥주를 보니 반갑네



음식맛은 나쁘지 않았다. 맛있었던 맥주와 아주 친절하셨던 직원분 때문에 마음도 조금은 달래졌다. 그래도 히가시무로란은 내게 ‘거절을 많이 당한 도시’로 기억될 것 같다. 나중에 구글 리뷰를 보니 일본인들도 여럿 거절당했다는 후기를 남겼길래 (내가 타지인이어선가? 하고 썼더라고요 ㅎ) 묘한 위로를 받았다. 외국인이라 거절당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인가.








최근 어떤 여행 유튜버가 식당에서 거절당할 뻔 하다가 아, 한국사람이구나? 그럼 들어와요 하는 장면을 보았다. 한 일본인 지인도 무로란 거절 릴레이 이야기를 듣더니 네가 (특정국가) 사람인 줄 알고 그랬을 거야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 나라 사람이라면 거절당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듯이.

이건 아니지 싶다가도, 다문화 사회에서 살다보니 눈살 찌푸려지는 일도 많아 수긍이 되기도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출신 국가로 사람을 그룹 짓는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상념에 잠긴 채 호텔로 돌아와보니, 휴게실로 개방해 둔 식당 공간에서 열 명에 가까운 한국인 가족이 음식과 술을 잔뜩 펼쳐놓고 와글와글 신나게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 봐, 국적은 상관 없다니까… 껄껄. 하지만 (아마도) 호텔 규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방에서만 안 들리면 되지.



생각이 복잡해지는 하루였는데, 목욕을 마치고 마사지 체어에서 행복 수치가 만땅에 오른 남편은 호텔에서 야식으로 제공하는 무료 라면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사진을 찍자고 하면 쿨한 척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찌그려뜨려서 (도대체 왜…?) 쓸만한 사진이 없었는데, 25년 동안 찍은 중 가장 행복한 표정의 사진이었다.

.

.

.

남편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빠진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공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