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라면

배탈이 나도 먹는 라면 (2025년 10월 9일)

by 그래도 캠핑

<패밀리가 떴다>였던가? 아마 최초로 여성 연예인들이 시골에서 먹고 자면서 민낯을 보여주던 예능. 기억이 맞다면 이 방송 덕에 박예진 배우가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무슨 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여성 연예인들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엄청난 식성을 자랑하면서 반전매력을 선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아내는 말했다. "저렇게 먹고도 저런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세가지야. 입이 짧거나, 미친 듯이 운동을 하거나, 장이 안 좋거나."


약간은 불합리한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내가 전형적인 세 번째의 케이스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운동이라고는 출퇴근 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직장에서 몸 쓰는 일을 한다는 것밖에 없음에도 (두꺼운 옷을 입으면) 50대 중반에도 그나마 인간스러운 몸을 유지하고 있는 건 죄다 이 도무지 인내를 모르는 장 덕분이라는 것. 기름기라고는 태연히 담아 둘 생각 없는 까칠한 장의 행태를 보고 오죽하면 장인어른이 이런 덕담을 다 하셨을까. "어어어, 내 친구 놈 중에 딱 저렇게 기름진 거 먹으면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던 놈이 있었는데 췌장암으로 먼저 가더라고..."


또 이렇게 가족사를 팔아먹어 봤지만, 결국 앞서 말했던 기능성 요구르트를 먹자마자 공중화장실을 찾아다니느라 무척 바빴다는 이야기. 정말로 요구르트 때문인지, 아니면 누적된 맥주의 효소 때문인지 점심때 같이 먹은 굴튀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코다테 시내에서 다시 숙소 방향으로 걸어오는 내내 팔뚝으로 둑의 붕괴를 막았다는 어느 네덜란드 소년을 생각해야만 했다. 덕분에 카네모리 아카렌가 각 건물마다 화장실이 두 개씩 있다는 것, 그리고 하코다테 기차역 공중화장실, 그리고 하코다테에서 히가시 무로란으로 가는 '특급 호쿠토 (北斗)' 열차 안 화장실에는 비데가 없다는 (다른 여행기에는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사실도 이 자리를 통해 공개합니다. (이번 여행기는 병상일지에서 벗어나려나 했는데 ㅠㅠ)





복통으로 상념에 잠긴 모습




오늘은 오후에 무로란이라는 동네에서 1박을 한 후 내일 삿포로로 간다. '홋카이도 온천탐방'을 여행 소주제로 삼은 아내 입장에서는 무로란 온천물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 거겠지. 열차는 3시 출발하기에 그때까지는 호텔 휴게실에서 잠시 진정을 하고 있어야 했다. 역 주변에 각종 군것질 거리가 넘쳐났건만, 아무런 스낵도, 에키벤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물만 열심히 마시는 수밖에, 엉엉.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자마자 얼른 눈을 붙였다. '히가시 무로란 역 (東室蘭駅)'까지 가는 열차는 홋카이도 남쪽 해안 선로를 타고 간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눈요기보다 쉬는 게 더 중요했다.


2시간 반정도 소요해서 5시 반에 히가시 무로란에 도착했을 때엔 다행히 많이 진정된 상황이었다. 잠이 보약이라는 진리를 어디서나 통용되는 거였다. 이 정도면 무로란하면 사람들이 손을 꼽고 얘기하는 야키토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야키토리에 맥주가 빠질 수 있겠어요? 아내가 미리 검색해 둔 이자카야가 역에서 숙소로 가는 동안 있다고 하는데, 일단 짐을 풀고 다시 나오기로 한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역 주변의 모습을 관찰하는 게 여행의 재미이기도 하지만 이미 컴컴해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기차에서부터 우르르 같이 내리던 일군의 무리가 있었으니, 딱 봐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수험생들. 아... 이미 하교시간이 지났겠구나. 역에서 나온 이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보니 다름 아닌 입시학원들이었다. 알고 보니 무로란이라는 동네에는 일본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무로란 공업 대학이 있었고, 무로란 공대는 역시 무로란에 소재하고 있는 일본 제철 (구 미쓰비시 제철)과 산학협력이 잘 되어 있어서 높은 취업률을 보장한다고 한다. 그러니 역 주변에 입시 학원들이 즐비했던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관광여행 중에 느닷없이 이렇게 심각한 일상의 조각을 마주치면 무척 당황스럽고 부끄러움마저 들기도 한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보겠다고 버둥치는 동안 저만 이렇게 칠렐레 팔렐레 쳐묵쳐묵 하다가 배탈까지 났네요.










무로란에서 신세를 진 도미인 (Dormy Inn)이라는 숙소는 '(주)교리츠 멘테난스 (共立メンテナンス)'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 호텔 / 기숙사 / 리조트 기업에서 운영하는 호텔 체인으로, 한국 여행객들에겐 어매니티 서비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무로란뿐만 아니라 삿포로, 오비히로 등 일본 전국에 91개의 호텔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숙박지가 예산을 초과했던 관계로 소도시 무로란에서만 이렇게 체험해 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무로란 온천물을 제공하는 대욕장이 있고 욕장에 있는 동안 세탁을 할 수 있는 무료 세탁장, 욕장에서 나오면 즐길 수 있는 무료 아이스크림과 무료 마사지 의자, 그리고 세상에!!! 밤에 호텔 식당에서 야참 서비스로 제공된다는 무료 라면이 있었다! (물론 숙박료에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공짜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호텔.



야참용 무료 라면 안내 간판과 세탁장 근처에 있던 만화들. 무로란 온천물이 자랑인 숙소인 만큼 <테르마이 로마이>가 있었다.



오늘 밤엔 다른 건 못해도 반드시 공짜 라면은 먹어주리라 굳게 다짐을 하며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선다. 내보낼 만큼 내보내서 위장이 빈 상태였거든요. 먼저 아내가 찜해두었다던,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유명 이자카야의 문을 열고,


1) "두 명인데 괜찮을까요?"라고 물어보니,

2) "예약은 하셨나요?"라는 답이 돌아왔고,

3) 난감한 표정으로 "아니요"라고 답을 하니까,

4) "잠깐만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니 주방과 쑥덕쑥덕 (흘깃흘깃),

5) 이번엔 저쪽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오늘 저녁은 만석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그리고 다른 집에 가도 1번에서 5번의 반복이었다. 아니.. 우리한테서 무슨 냄새나나? 이렇게 박대를 당할 줄이야. 만일 이 일련의 행동들이 외지인 기를 죽이기 위한 셋업이라면 무척 효과적이었다는 찬사를 드리겠습니다. 심지어 가로등 하나 없어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피해 나카지마 공원 (中島公園)을 삐잉 돌아서 찾아갔던 중국집에서는 밥이 다 떨어졌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네? 저녁 7시 갓 넘었는데, 중식당에서 밥이 떨어졌다구요? 왠지 조롱당한 느낌이 들어 그럼 술은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또 주방에 들어가 숙덕이고 나서 술은 있다고 한다. 이건 뭔가요? 왜 주류재고 체크를 주방이랑 하는 건가요? (나중에 이 중식당의 리뷰를 검색하는 와중에 어느 일본인이 오후 4시에 밥이 떨어졌다며 거절당했다고 쓴 리뷰를 발견했습니다. 적어도 한국인 차별은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흑..)


돌아 돌아, 별점은 비록 낮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한산해 보였던, 숙소 앞 식당 '춘하추동 (遊食ダイニング 春夏秋冬)'에 가봤는데 나이 많은 할머니 접객원이 방긋하며 반겨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처음 숙소를 나서면서 단지 상호를 너무 성의 없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건너뛰었었는데, 지금은 단지 식당에서 환대를 받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구나. 근데, 다른 식당들은 자리가 가득 찼던데 어쩌면 이곳은 이리 텅 비었나. 조금 쌔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고맙게 먹자. 일단 생맥주부터 주십쇼.


마치 오천년 된 빙산에서 꺼내 담은 것 같은 맥주




어흑. 잠시나마 의심했던 저를 벌해주세요. 사실 처음에는 배탈이 걱정되어 맥주가 아니라 사케를 주문했었지만, 아내의 맥주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까지 꽁꽁 얼린 잔에 맥주를 마시니 실시간으로 맥주에 살얼음이 끼는 걸 다 볼 수 있구나. 답답했던 속이 뻐엉하고 내려가는 것 같다. 이어서 야키토리, 오징어 볶음, 생선구이 등으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마지막으로 주먹밥을 주문했다. 한국 식당에서 고기나 전골을 먹은 후 불판이나 냄비에 볶음밥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처럼, 일본 이자카야에서는 주먹밥으로 마지막 끼니를 정리한다는 걸 만화에서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인데,




엉엉엉. 소금과 버터와 함께 반죽한 후 석쇠에 구운 주먹밥이라뇨. 너무 반칙 아닌가요? 이게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끼니를 정리하기 위한 주먹밥이었는데, 당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배탈이 두려워 이걸로 그만.










숙소로 돌아가 공짜 목욕 - 공짜 아이스크림 - 공짜 마사지 의자 3단 콤보를 즐긴다. 으헝헝헝. 이상하다. 마사지를 하는데 왜 소화까지 다 잘 되는 것 같지? 마사지 의자의 기술력이 이제 사람을 노곤노곤 녹아내리는 걸 넘어 통합치료를 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구나. 온몸이 조물조물 만져지고 있는 와중에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종아리와 발은 양쪽을 동시에 마사지하면서 왜 팔과 손은 한쪽씩 따로 마사지를 하는 걸까? 무슨 아이누 족의 오래된 전통인 걸까? 등등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도중, 으아아악! 척추를 따라 내려가던 지압 롤러가 엉치뼈를 누르는 순간 이유를 알아냈다. 어느 한 손은 반드시 긴급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어야 하겠구나.



그리고 밤 9시 반까지 기다려 공짜 라면으로 하루를 보람차게 마무리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