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26
많은 단어들이 그렇지만,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에서 본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특히 정치 관련해서 그러한데, 두 단어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함부로 사용하는 것 같아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코미디는 과거 캐나다에 있던 한 정당 'Progressive Conservative'의 이름이다. '진보적인 보수'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지.) 뭐, 각설하고.
아무튼 입맛에 관해서라면, 내 입맛이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맛집'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식도락 동호회까지 가입해가며 맛있는 걸 찾아다녔던 사람으로서, 이민 후에도 이름난 식당들을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기록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새로운 집을 찾아다니는 일에 예전만큼 열심을 내지 않게 되고, 자꾸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가본 집만 계속 가면서.
이유를 굳이 생각해보자면 트렌디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게 된 탓도 있겠다. (뿌링클 치킨이라뇨, 까르보나라 불닭볶음면이라뇨... 참고로 이들 모두 이곳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인 듯하지만.) 또한 예전처럼 왕성한 소화력을 갖지 못한 관계로 식사 후엔 후식,이 어려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일본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좀 보수적이 되었는데, 여행 막바지가 되자 컨디션 조절이 편해져 조금씩 궁금했던 것들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홋카이도 멜론 사와'. サワー(사와)는 칵테일 'sour'를 일본식으로 부르는 이름인 것 같다. 달달하고 주스 같아서 꼴깍꼴깍 마시다 보면 위험해질 술이다. 그리고 커피 우유. 예상 가능한 달달한 커피 우유 맛 ㅎㅎ
오늘 아침엔 뭘 먹을까 했더니 남편이 자랑스럽게 봐둔 데가 있다고 한다.
그러자꾸나.
홋카이도에 이상 기후로 계속 덥다 싶더니, 날이 흐려서인지 시월 중순이 다 되어서인지 제법 쌀쌀해졌다. 이른 아침, 상가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 풀빵 가게로 갔다. 풀빵 가게에 왜 줄을 서 있나 했더니,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뒤집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한 번에 많이 사가는 사람들은 미리 예약을 하라고 적혀 있다. (근데 예약하더라도 한 땀 한 땀 굽는 시간은 똑같을 거 아녀… 경의를 표합니다.)
팥 하나, 치즈 하나, 그리고 찐빵 하나를 주문했다. 구글 리뷰에는 주인이 불친절하다는 평이 좀 있었으나, 내가 천천히 주문하거나 잔돈을 세어 계산하는 것에도 친절히 대응해주셔서 딱히 그런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아마 많이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안 된다고 해서 그런 리뷰들이 있는 듯.
팥맛은 아주 예상 가능한 맛이었다. 오방떡.
치즈 풀빵은 꽤 맛있었다. 안에 모짜렐라 치즈가 꽉 차 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잖아? ㅎㅎ
남편은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도 하나 먹었는데 나는 별로 당기지 않아 먹지 않았다. 게다가 곧 아점으로 부타동을 먹으러 갈 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남편이 매우 감동했었나 본데? ㅎㅎ
오비히로 하면 주로 두 가지 음식이 언급되는데, 하나는 부타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식 카레다. 부타동 집도 여러 곳이지만, 우리는 어느 블로그의 '부타동 도장 깨기' 포스팅에서 1위로 꼽은 주택가의 한 식당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듯한 소박한 식당이다.
비가 와서 처마 밑에 서 있었는데, 문을 열러 나온 직원분이 굳은 얼굴로 비키라는 듯 해 약간 기분이 상했다. 낯선 환경에 있으면 작은 일에도 왠지 민감해진다. 우리는 놀고 있지만 저분은 아침부터 일하시니까, 피곤하겠지 라고 억지로 이해해 본다. (정신 승리 하나는 참 잘하는 편.)
자리로 안내받아 주문을 마쳤다. 이 집 돈지루가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추가했는데 뜨끈하니 좋았다. 부타동은 밥에 숯불구이 돼지고기를 얹은 딱 그 맛이다. 제육볶음의 나라에서 자라서 그런가, 서로 다른 음식이긴 해도 둘 중 고르라면 고추장 구이가 더 맛있지 않나…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고 나서는 남편이 가고 싶다던 경마장으로 향했다. 호텔에서부터는 거리가 꽤 되니 버스를 탈 생각이었으나, 여기저기 들르다 보니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아 다시 걷기로 했다. 비도 많이 오지 않아 걸을 만했다.
가는 길에 디저트 전문점 '롯카테이(六花亭)'가 있었다. 남편은 본인은 안 먹으면서도 가보라고 권한다. 랜드마크나 유명 먹거리를 '섭렵'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기에, (홋카이도 전역의 기념품점에 깔린 '시로이 코이비토' 쿠키도 먹지 않고 옴...) 오타루 지점도 그냥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들러보기로.
매장 안에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냉장고 앞 주문 줄은 길지 않아 현지에서만 살 수 있다는 유효기간 짧은 디저트 두 가지만 주문해서 나왔다. 일단 'サクサクパイ (사쿠사쿠 - 바삭바삭 - 파이)'. '3시간 안에 먹어야 하는 디저트'라는 마케팅으로 유명한데, 파이지를 대롱처럼 만들고 안에 크림을 채웠다. 걸으면서 먹느라 사진은 없음. 나머지 하나는 '雪こチーズー (유키콘 치즈)'. 초콜릿 비스킷 사이에 꾸덕한 치즈를 두껍게 끼웠는데, 내 입맛엔 이게 더 맛있다.
얼른 먹어야 하니까(?) 남편이 주변을 탐방하는 동안 경마장 대기석에서 냠냠. 너무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들도 종종 해봐야지, 하고 새삼 생각하며 먹었다. 아침에 호지차를 보온병에 담아온 것을 곁들여서.
사실 갓 만든 음식을 바로 먹었을 때 가장 맛있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상품화 시키긴 어렵다. 그런데 그 당연한 '한계'를 오히려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것이 감탄스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