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놀이동산과 같았던 반에이 경마 (2025년 10월 12일)
때는 1990년대 초.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건 만 아직도 계속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딱히 뭐 하는 건 없었고 그냥 술이었다. 맨날 맨날. 만나면 반갑다고 술. 헤어지면 아쉽다고 술. 아침엔 희망차게 술. 저녁땐 낭만적으로 술. 3당 합당으로 독재정권의 수명이 길어진 것에 개탄... 하거나 그랬던 건 아니고, 주로 헛소리를 하며 낄낄거리면서 술을 마셨다. 그땐 그걸로 좋았다. 어른이 되었다고 하기엔 모든 부분에 무척 미숙했던 당시. 친구들과의 바보짓에 잠시나마 불안함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 친구가 과감하게 말을 꺼냈다.
- 야, ㅆㅂ,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무슨 뽀뽀뽀 친구도 아니고. 언제까지 ㅆㅂ 만나면 술만 쳐마실래?
- 아이 미친 시키. 또 지랄이네.
- ㅆㅂ, 퓽신 시키가... 아니 ㅆㅂ, 이젠 좀, ㅆㅂ 좀, 성숙하게, 엉? 좀 놀아도 어른같이 놀자고. 다 커 가지고 맨날 동네에서만 처박혀가지고, 엉? 스포츠도 좀 즐기덩가, 엉?
- 그럼 ㅆㅂ, 니가 나서서 찾아보든가, 피융신 시키가 입만 살아가지고.
....
뭐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고, 결국 그 친구의 인도로 전철에 올라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과천 경마장.
죄짓는 것도 아닌데 경마장 입구로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냥 뭐든 첫 경험이 그런 건가? 어른처럼 스포츠를 즐겨보자던 그 친구 역시 경마장은 처음이었기에, 우린 어떻게 마권을 사는 건지도, 어느 말의 승률을 어떻게 보는 건지도 전혀 몰랐다. 그냥 첫 경험에 얼굴만 상기되어 생글생글. 그 와중에도 눈에 핏발이 잔뜩 서서 마권을 움켜쥔 채 장내 TV 화면만 응시하던 아저씨들의 모습에 주눅 들기도 했었다.
어찌어찌 마권 구매에 성공한 후 관중석에 올라갔는데, 이건 도무지 어느 말이 우리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보다, 어디가 출발선인지도 몰랐다. 잠시 후 빵빠레가 울리고 말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시작한 거야? 엉? 시작한 거야?'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결승선 역시 찾지 못해서 승부의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단지 전광판에 오른 말의 번호가 우리가 고른 말의 번호와 달랐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하게 날린 만원이었지만 친구들끼리 모이면 항상 하던 바보짓들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동네로 돌아왔었다 (물론 경마장에서 바짝 쫄았던 서로를 놀려먹는 술자리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부타동 다음으로 오비히로를 대표하는 건 바로 '반에이 경마 (ばんえい競走)'. 반에이라는 말 자체가 '판자를 끌다'라는 뜻의 한자어인 '만예(輓曳)'에서 왔다고 하니까, 문자 그대로 '짐썰매 경마'가 되시겠다. 1900년대 초 홋카이도 개척시기 때부터 농경마들의 힘을 자랑하는 축제 (お祭り輓馬 오마츠리반바)가 있었고,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정식 경마 경기가 되었다고 한다. 200미터 직선거리에 두 개 오르막이 있는 코스를 600 킬로가 넘는 썰매를 끌고 가는 경기로 자리 잡았는데, 경기에 참여하는 '반바 (輓馬, 짐을 끄는 말이라는 뜻)' 품종의 말은 홋카이도 재래 도산코 말의 3배, 일반 경마용 서러브레드 종의 말보다 1.5배 정도 크고 2배 더 무겁다고 한다. (자기들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유일한 '썰매 끄는 경마'라서 그런지 오비히로 시에서는 말에 관련된 관광상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 같았다. 시내에는 '바샤바 (馬車BAR, 마차 바 https://www.visit-hokkaido.jp/kr/spot/detail_11241.html )'라고 해서 마차 안에서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면서 시내를 관광하는 상품도 있을 정도로.
하염없이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40분 정도 걸었나? 드디어 '반에이 토카치 (ばんえい十勝)' 경마장에 도착했다. 이때가 오후 1시 반 정도. 여전히 배는 든든한 상태여서 주변의 수많은 먹거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단 경마장 건물로 직진했는데... 아 갑자기 35년 전 기억이 소환되었다. 이야아아. 경마장은 정말... 혼잡하고 정신없구나.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번엔 일본말로 적혀있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많았는데, 무슨 유명한 경정 (보트경기) 선수가 와서 사인한 선물을 나눠준다고 한다. 재빨리 줄 서서 받아오긴 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너무 시끌시끌. 답답한 마음에 일단 경주 트랙을 구경하러 나간다. 첫 라운드가 2시 35분 시작이라고 하니.. 아직은 좀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고 나선 발매창구 건물 뒤편에 조그맣게 만들어둔 마구간 순례를 간다. 우오오오오 반바(輓馬) 품종은 정말 크구나. 무척 순둥순둥하기까지. 도산코 말은 귀엽기 그지없고 ㅎㅎㅎㅎ
이제 출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마권을 사러 간다. 정말이지 마권구매에 대해서 여전히 1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눈치빨을 살려 남들 하는 걸 따라 해 본다. 35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적어도 내가 돈을 건 말이 어떤 말인지 기수가 누군지는 알고 걸었다. 그래봤자 유일한 여성 기수라서, 출주 전 채덕에서 라운드업을 하는 말이 귀여워서...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이유로 걸었지만...
반에이 경마에서는 각 레이스마다 개인협찬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졸업축하, 생일축하를 타이틀로 하는 레이스 명도 정해진다고. (https://banei-keiba.or.jp/sv_kyousan.php)
그리고 경기 시작... 트랙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씩 모여든다. 대부분 아이들 동반한 가족들이다. 예전 과천 경마장의 기억과는 사뭇 다른 광경. 이곳 반에이 경마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 비해 사행성 게임이 대중들에게 친숙해 있고 오랫동안 발전해 온 일본에서는 경마 같은 건 그냥 가족오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사실 신발을 고르는 일보다 더 인고의 시간이었던 건 카메라 렌즈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반에이 경마는 무조건 일정에 포함되었고, 무척 밋밋했던 <은수저> 영화판의 경마 장면보다는 좀 더 감정이 실린 장면으로 찍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하지만 들고 다닐 무게도 생각해야 되고.. 처음에는 휴대폰에 장착하는 망원렌즈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써보니까 차라리 휴대폰 디지털 줌이 오히려 낫다 싶었고.. 암튼, 수많은 옵션을 테스트한 결과로 이번 여행에 동반하게 된 렌즈가 정해졌는데...
카메라 배터리가 다 나갔지 뭐예요.
아이 증말.. 이 눔의 소니 카메라.. 전원 스위치를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든 건지, 어흑... 가방 속에서 툭 건들려 저절로 켜져 방전이 된 것 같았다. 아놔. 그래서 결국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보시는 동안 화질이 안 좋거나 앵글이 어지럽다면, 그건 죄다 장비 탓입니다.
* 아래의 동영상에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람이 불편하실 수 있으니 사전에 양지 바랍니다.
가만 보니 기수들의 모자 색깔이 다 달랐다. 덕분에 이번에는 내가 돈을 건 말의 주행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좇을 수 있었지만... 죄다 꽝이었습니다. 세 번 했으나 세 번 다. 엉엉. 그런데 도박이라는 게 참 이상해요.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유라고 하더라도 나름 성의껏 말을 골랐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최종 후보 두 마리가 끝까지 남게 되고, 그중에서 또 수많은 마음의 부침 끝에 말 한 마리를 골라 돈을 걸었는데, 1등으로 들어오는 말은 꼭 최종 후보 중 다른 말이 되더라니까요. 이렇게 (내가 해석하기에) 아슬아슬한 결과 때문에 다음번에는 왠지 될 것 같은 헛된 기대, 그리고 그게 반복적인 실패를 유도하는 건 모든 도박이 똑같은 것 같습디다.
결국 마지막으로 딱 한 판만 더 하자는, 이번엔 증말 딸 것 같다는 아내를 질질 끌고 나와야 했다. 어느덧 4시가 다 되었고, '반바박물관' 등 반에이 경마장 내 다른 관광시설들이 4시에 닫는다는 이유로 설득해서.
돌아갈 때는 반드시 버스를 타고 가리라 다짐했건만 역 쪽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이상하게 꼬여있던 관계로 다시 40분간 비를 맞으며 걸어 돌아왔다. 예약이 없어서 빠꾸 맞았던 어제의 학습효과 때문에 아까 낮에 구글맵-라쿠텐으로 예약을 걸어 둔 식당으로 향한다. 이런 날씨는 무조건 오뎅이죠. 네. 가게 이름은 무척 발음이 어려운 '코로나기라이 (炉端とおでん 呼炉凪来 帯広駅前店)'. 한국 블로거나 유튜버한테 인기 있는 프랜차이즈 오뎅집인데 오토시로 나오는 오뎅이 무한 리필이랍니다. 우오오오오.
예약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다행히 바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빗속을 걸어 다녔더니 완전히 오뎅 레디 상태. 종업원이 와서 2시간 음료 무한리필 (飲み放題, 노미호다이) 상품을 은근히 권한다. 사람당 안주를 2개 이상시키는 조건으로 인당 2천엔 정도. 맥주 한 잔이 보통 5백엔 하니까 4잔만 마셔도 본전을 뽑을 것 같다는 잔머리가 먼저 돌긴 했지만... 아... 여행 막바지인데 과음해도 되는 건가, 몸이 과연 버티려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우짤까나... 저희가 술이 좀 약해서요.. 좀 생각해 봐도 되나요, 하고 물어보니 최초 주문할 때 결정해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한다. 알았습니다. 합죠. 마시면 될 것 아니에요. 일단 전 생맥주 한 잔이랑 하이볼 한 잔 갖다 주세요. 아뇨, 같이, 둘 다 동시에 주세요.
엥.. 이거 넘 독한 거 아닌가요? 어제 마신 하이볼보다 3배는 더 독한데요? 일반적으로 하이볼 글라스에 넣어 얼음과 같이 마시는 칵테일은 더블샷이 1.5온스, 좀 세게 마시더라도 2온스 (약 59ml)의 베이스 알코올음료를 넣어 마시는데, 이건 뭐, 200ml는 채운 느낌이다. 거의 소다수와 위스키를 50:50으로 섞어 넣은 것 같다. 안 그래도 쌀쌀한 길을 걷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데, 이 정도 술을 집어넣으니 금세 취기가 오른다. 어이쿠
다행스럽게 이 집의 2시간 음료 무제한 상품에는 무알콜 음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호지차와 우롱차, 각종 사와 등을 주문해서 알코올도수를 조절해 가면서 줄기차게 먹기로 한다. 사실 안주들은 그냥 편의점이나 휴게소 음식 수준. 오뎅도 편의점에서 주는 오뎅 수준이긴 했지만, 야키도리는 아무래도 이 지역 평균 수준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지 삿포로보다 훨씬 나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소주가 있더라구요. 그것도 쿠마모토 지역 특산, '쿠로키리시마 (黒霧島)' 고구마 소주. 오오오. 이건 빼먹을 수 없지. 고구마로 만드는 증류식 소주라니 말만 들었지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첫 알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물론 스트레이트로 마셔야죠. 그런데, 일반 올드 패션 텀블러 글라스에 가득 채워 나온다 ㅎㅎㅎㅎ. 아니 보통 스트레이트는 많아야 1.5온스를 주는데, 10온스라뇨. 마시고 빨리 죽으라는 얘기구나, 이러니 아까 하이볼이 그리 독했지. 여기 따뜻한 우롱차도 하나 더 주십쇼.
이렇게나 끊임없이 술을 주문하다 보니 처음에 무한리필을 권유받았을 때 우린 그렇게 과음하지 않는데.. 하며 튕겼던 게 좀 민망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새로 들어온 바로 옆자리 일본인 그룹 테이블에서 5분마다 새로 생맥주를 받는 걸 보니... 아, 우리 정도면 매우 양심적으로 마신 거네.. 하며 떳떳한 느낌이 들었다.
신나게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도 캐나다 달러로 70불 정도. 핫핫핫. 세금이나 팁이 나중에 따로 붙지 않는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쾌적해질 수 있구나. 잘 먹었다며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종업원 한 분이 조또마떼구다사이 하며 뛰어나와 우산을 건네준다. 아웅. 감동. 비를 맞고 걸으면서도 우산을 두고 나왔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우리도 참 한심한 상황이었지만, 손님 우산을 찾아주기 위해 본인은 손바닥으로 비를 가리면서 뛰어서 쫓아오다니요. 일본인의 친절에 대해 선입견도 있었고, 이번 여행을 하면서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도 왕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소소한 친절함이 바로 관광객들을 돌아오게 하는 힘이 아닌가 싶었다.
배도 꺼뜨릴 겸 동네 탐험을 좀 더 해야겠다 싶어서 1분 정도 방황했었는데, 지난 2시간 넘게 계속해서 하이볼, 사와, 아이스 티, 생맥주 등을 계속해서 들이켜서 그런 건지 갑자기 한기가 확 돌았다. 턱을 딱딱 부딪히면서 얼른 숙소로 돌아간다. 한시라도 빨리 목욕탕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