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불통? - 밴쿠버에서 신치토세 공항으로

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2

이다혜 작가의 여행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를 읽으며 공감했던 내용 중 하나는, 부모님들의 여행 가방 하나가 약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부분이었다. 엄마도 생전에 우리 집에 올 때 큼직한 가방 하나가 다 약이었다.

아직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은 없지만, 아파서 못 놀면 안 된다는 비장한 마음에 각종 영양제를 챙겼다. 종합 비타민, 각종 면역력 영양제, 그리고 장이 약한 남편을 위한 유산균 제제와 유당불내증 약까지. 평소 나보다 약을 더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은 일본에 가면 현지 약을 사 먹겠다면서 영양제를 챙겨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 것만 작은 병에 소분해 넣었는데도, 2주 넘는 기간 동안 먹을 약통들이 작은 파우치에 가득 찼다.


지난 여행을 통해 나에게 맞는 짐 싸는 요령을 어느 정도 습득했던 나는 여행 전날에야 필요한 것들을 캐리어에 챙겨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남편은 2주 전부터 신발을 여러 켤레 꺼내 신고 또 신어보며 결정을 어려워했다. (남편은 특별히 넓고 푹신한 신발이 아니면 발에 통증이 있다.) 거기에 손목 부상으로 캐리어를 끌기 어려울 거라면서 백패킹 배낭을 쌌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워낙 캠핑도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라, 여행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서 여행이 싫다는 걸까? 그럼 캠핑은 왜 좋아하는 거야... 준비랑 다녀온 후 정리까지 몇 배는 더 힘든데...)




여행 당일. 토요일 오후 출발이라 아침이 여유로웠다.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내리고 달걀을 스크램블 해서 토스트와 함께 먹었다.

이전 여행에서는 공항까지 전철을 타고 갔었지만, 남편이 이번엔 우버를 타자고 한다. 좁은 공간에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택시나 우버는 불편한 옵션이지만, 남편 손목 상태를 고려하여 조금이라도 편하게 이동하기로 했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다가 탑승했다.


항공권을 예매할 무렵 남편이 무릎 부상으로 무릎 굽히는 것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추가 금액을 내고 비상구 옆자리를 예매했었다. (ANA가 에어캐나다보다 좌석 지정 추가 금액이 저렴했다. CAD 50.) 자리에 앉은 후 승무원으로부터 비상시에 문 개방과 승객 탈출을 도와야 한다는 안내를 들었다. 비상구석은 종종 일어나 스트레칭을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지만,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는 가방을 오버헤드 빈에 보관해야 했고 (앞 좌석 밑에 보관할 공간이 없으므로), 나처럼 체구가 작아 다리가 짧은 사람은 바닥에서 발이 떠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따뜻한 물수건이 제공되었다. 일본 국적기를 탄 실감이 났다. 뒤이어 음료 (ANA에서만 제공한다는 香るかぼす(가오루 카보스)라는 시트러스 계열의 달콤한 음료를 골랐다)와 쌀과자가 나왔다.

첫 번째 식사는 생강 볶음 돼지고기 요리와 소고기 키마(Keema) 카레 중 선택이었다. '다진 고기를 넣어 수분을 날려 만든 드라이 카레'라는 생소한 설명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안전하게 돼지고기를 선택했다. 무난한 간장 양념 맛이었다. 예전에 ANA 기내식에서 꽤 잘 조리된 소바가 포함된 정갈한 식사가 나왔던 기억이 있어 약간 기대했었는데, 이번엔 그럭저럭 먹을 만한 정도였다. 두 번째 식사는 보기만 해도 맛없어 보이는 참치 샌드위치. 군말 없이 먹는 남편에게 물으니 역시나 맛없다고 한다. 식욕이 일지 않아 그대로 반납. (나중을 위해 챙겨뒀어야 했다...)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스릴러들로 채운 이북리더기로 책을 읽다 보니 하네다 공항이 가까워진다. 그런데 빠듯하게 환승해야 하는 우리 사정은 아랑곳없이, 화면 속 공항에 거의 다가갔던 비행기는 다시 공항과 멀어져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안내방송을 들으니, 도착하는 항공기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지연이란다. 심장이 졸아들며 이 항공편을 예매한 스스로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거의 30분 정도를 늦게 도착한 것 같다. 비상구석에 앉았기에, 바로 앞에 앉아계시던 승무원분께 (좀 빨리 나가게 해 주시려나 하는 기대로) 급히 갈아타야 한다고 하니 친절하고 명랑하게 터미널 번호만 말씀해 주신다.




그나마 다행히 좌석이 앞쪽이어서 비교적 일찍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허겁지겁 뛰어나오는데, 대기하던 직원이 환승 승객 확인을 하며 무슨 티켓을 건네준다. 뭔지도 모른 채 받아 들고 또 우당탕탕 뛰어가서 입국 수속을 하는데, 이분 정말 일하기 싫으신가... 내가 앞에 서 있는 동안만 하품을 열 번은 하는 것 같다. 머리에 김이 오르기 시작하지만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간신히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뛰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다른 젊은 직원 한 명이 급히 따라오며 시간이 촉박하니 기차를 타라고 말해준다. 셔틀버스보다 빠르다고. 고맙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아까 받았던 것이 그 기차 티켓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지만, 기차는 방금 떠났고 다음 기차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비행기 보딩 시간이 8시 5분인데 다음 기차가 8시 3분이네 허허. 짐도 아직 안 부쳤는데.


머릿속이 하얘진 채 기차를 기다리고, 타고, 내려서 국내선 입구까지 다시 뛰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줄을 일단 무시하고 직원에게 보딩패스를 보여주자 그쪽도 패닉. 한 직원은 비행기 측과 급히 통화하고, 다른 직원은 수화물 수속이 끝났으니 짐을 기내에 들고 타야 한다고 한다. 날카로운 물건이 있냐기에 열쇠고리에 달고 다니던 미니 빅토리녹스 멀티툴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 그렇게 겨우 탑승구역으로 들어갔다. 다시 수하물 검사 후 짐을 챙겨 들자마자 탑승 게이트를 향해서 미친 듯이 뛰었다. 하필 게이트도 거의 끝쪽에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속으로 내가 다시 급한 환승 표를 사나 봐라... 차라리 거기서 하루 묵고 다음 날 가든가 해야지 수없이 외쳐대면서...


그나저나.. 우리가 국내선 입구에서 직원들과 분주하게 대화하는 동안 밴쿠버에서부터 뵈었던 세 분의 할머니들도 같은 카운터로 오셨던데. 과연 그분들은 비행기를 타셨을까?




다행히 비행기는 놓치지 않았다. 시간을 넘겨 헐레벌떡 탑승하는 지각쟁이들이 전부 면세점에서 정신을 팔다가 늦는 건 아니겠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도 얻었다.


국내선 입구를 통과할 때도 그랬지만 비행기에 탑승하고서도 약간의 문화적 충격이 있었다. 국내선이라선가 승무원분들이 주로 일본어로 (그것도 아주 긴 문장) 이야기하셨고, 영어는 단어 단위로만 쓰셨다. 우리 짐을 오버헤드 빈에 올려야 한다는 내용을 아주 친절하게 이유까지 덧붙여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지난 교토와 도쿄 여행에서 외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해진 사람들과 상대하며 (모든 대화가 아주 짧고 간단하게 진행됨) 자신감이 만땅에 올랐었던 나는, 그 자신감이 푸슈슈 꺼지는 느낌을 이때부터 시작해 여행 내내 받게 된다.


두 시간여 후, 삿포로 신 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하는 비행기였기 때문에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미리 예약해 둔 공항 내부의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방 창 밖으로 보이는 비행기들

에어터미널 호텔은 일본 호텔치고는 꽤 널찍했는데, 공항에 자리한 호텔답게 창 밖 풍경이 활주로였다. 평화롭게 정차해 있는 비행기들을 보자 이제 도착했구나 싶고, 안도감에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호텔에 묵는 동안 공항 내 온천 (그렇다. 신치토세 공항 내에는 온천이 있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큰 규모의 공항이 아니어서인지 밤 11시부터는 공항 출입문을 폐쇄한다고 해서 도착한 당일은 이용하지 못했다. 짐 정리를 하는 동안 남편은 호텔 로비 자판기에서 캔맥주와 가루비 감자스틱을 사 왔다. 저녁을 걸러 배가 고팠다. 아까 기내에서 먹지 않고 반납한 참치 샌드위치가 아쉬워진다.




남편이 먼저 글을 쓰면서 '번번이 통수를 맞는 일'이란 제목을 붙였다. 궁리하다가 나는 줄임말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를 흉내 내 '스불통(스스로 불러온 통수)'라고 붙여 본다.

여행은 내 시간과 돈을 들여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니까 혹시 낯선 환경에서 뒤통수를 맞더라도 스스로 초래한 셈이 되는 거. 물론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럴 일이 적어지겠지만, 그럼 사는 게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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