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여행이지 (2025년 9월 28일)
어느덧 아이패드의 시계가 오후 9시를 가리킨다. 서울표준시로는 이미 9월 28일 오후 1시가 되겠다.
비행에 대한 부담으로 어제는 아침부터 무척 우울해 있었는데, 손목 통증이 심해져서 결국 출국날 아침에 침술원에 다녀와야 했다. 밴쿠버의 침술원 (이곳은 ‘한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없고, 한의사라고 불리는 의료진들도 중의학 TCM, Traditional Chinese Medical School을 수료한 후 협회에서 주관하는 자격증 시험을 통과하면 침술사 Registered Accupuncturist 자격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한의원이라고 하기보다 침술원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만일 한약을 만들어 환자에게 제공하려면 TCM Herbalist와 같은 다른 자격도 필요하다)을 급할 때마다 몇 군데 찾아다녀봤지만 대부분 효과를 보질 못했고, 그나마 효과를 본 곳은 최소 4개월 기다려야 했는데, 마침 집 주변에 새로 오픈한 침술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환자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꼼꼼하게 진찰을 하는 게 신뢰가 갔다.
하지만, 침을 맞고 나면 가끔 그날 하루는 통증이 더 심해지는 현상이 있다는 걸 그만 잊고 있었다. 손목이 시큰거려서 저 짐을 들고 지하철을 타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공항에 전철을 타고 가려는 애초 계획을 접고 우버를 타고 가기로 하는데, 같은 종착지를 향하더라도 예약시간이나 차량 종류 등 여러 조건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한 우버 예약을 할 때마다, 아 이거… 조금 이따가 예약을 하면 가격이 좀 더 떨어지지 않을까 잔머리를 굴릴 때가 많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환경 친화적 차량은 요금이 몇 불 더 저렴해서 그걸 선택했더니, 테슬라 모델 3가 배차되었다.
아직도 2012년형 차를 몰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카오디오 버튼이 아니라 커다란 태블릿이 달린 걸 보면 그걸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운행 상태나 차량 상태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차체에 주렁주렁 매달린 카메라 덕분에 차량 주변 정보가 태블릿에 빼곡하게 그래픽으로 나타나는데, 정작 핸들에 손을 대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정보에 의존해서 운전할 일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테슬라는 도대체 왜 이런 꼼꼼한 정보를 태블릿으로 보여주는가? 조수석이나 뒷좌석 탑승객을 위해서? 현재는 그게 주 사용목적일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운전석에 있는 사람들도 그걸 보게끔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현재 운전자가 착석하는 운전석도 단순 탑승석으로 만들기 위한, 그리고 운전은 로봇이 대신하는 그런 세상에 대한 마중물이 아닐는지.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7년 전 출장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갈 무렵, 캐나다에도 우버가 들어온다고 시름에 잠겨있던 택시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나 본인 차량으로 운수업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된다면 지금도 충분히 힘든 택시업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지 않겠냐며.
7년 전 집에서 택시 타고 팁포함 100불을 주고 갔던 공항을 지금은 80불도 안 되는 요금을 지불한다. 승객을 태우든 음식을 배달하든, 우버는 여전히 밴쿠버에서 정규직을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첫 번째 Gig Job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저렇게 센터패시아 앞에 자리 잡은 태블릿의 정보들을 보고 있자니, 테슬라가 직접 자사의 로봇택시를 이용해서 운수업과 배달업에 뛰어드는 건 향후 1~2년 안에 결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의 많은 주에서 우버 기사들의 최저임금과 상해보험을 회사에서 보장해야 한다는 결정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다행히 머스크와 트럼프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좀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북미의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개인 사업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 자명하다. 이 정도면 우버가 테슬라 차량 사용자에게 환경친화 차량 할인 혜택을 줄 때가 아닐 텐데.
ANA의 밴쿠버발 여객기의 2025년 9월~11월 저녁 메뉴는 생강 돼지덮밥과 일본 카레 둘 중 선택할 수 있단다. 당연히 돼지덮밥. 그렇지만 그것보다 반찬으로 나온 야채절임과 감자사라다가 역시 더 입에 맞는다. 후식 아이스크림도 좋았고. 무엇보다 밴쿠버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기린 이치방시보리 맥주의 청량함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휴가라고 너무 한가한 생각만 하고 있었던가.
이 눔의 비행기가 어쩐지 출발부터 느기적느기적하더니 결국 연착. 1시간 30분 상관으로 환승 편을 타야 하는데 30분을 연착한다. 젠장. 아직 비행기 문도 안 열었건만 아내는 이미 가방을 들고 저 앞까지 쑤시고 나가는데, 연결 편이 국내선일 때는 대부분 입국수속과 가방픽업을 마친 후에야 연결 편을 승선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난리 쳐봤자 소용이 없다. 가방이 언제 나올 줄 알고. 그래도 이눔의 탑승교가 비행기와 공항을 연결하는 데 천년만년 걸리는 것 같다.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 ANA 항공기에서는 이렇게 하선대기하는 동안 기내 모니터에서 동영상을 하나 반복해서 상영해 주는데, 공항에서 길을 잃은 피카추가 승객들과 ANA 지상요원의 도움으로 결국 주인을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연결 편에 늦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며 그걸 보고 있자니, 저런 말썽꾸러기 피카추 녀석의 궁뎅이를 발로 차고 싶은 마음이었다.
밴쿠버에서 가방을 부칠 때 항공사 지상 요원은 우리가 경유 편을 이용해야 하기에 짐을 우선적으로 꺼내주겠다고 하면서 "우선 Priority" 태그를 달아주었는데, 막상 짐을 찾으려고 보니 Priority 태그를 달고 나오는 가방만 수십 개가 된다. 아니, 이러면 우선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간신히 가방을 찾아 들고 뛰어보지만 만나는 건 다시 긴 입국수속 행렬. 사람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보니 패스포트를 심드렁하게 보며 하품만 찍찍하는 입국심사원도 괘씸해 보인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플랫폼에 대기한 지상요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요량으로 상황을 설명하니까 친절한 목소리로 시간이 타이트하니 빨리 가라는 충고만 받는다. 에라이. 간바레 하라고?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툴툴거리며 다시 냅다 뛰려는데 뒤에서 한 청년이 우릴 붙잡고 어떤 티켓을 건네준다. 버스보다 급행열차가 더 좋을 거라면서 공항열차 탑승장으로 가라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개를 갈아탔나? 서둘러 달려갔음에도 이미 열차 하나는 놓치고 다음 열차는 3분 후. 쩝. 뭐 늦으면 어쩔 수 없지. 하네다 공항 근처에서 하루 묵어야지 머. 놀러왔는데 화내지 말자. 급행열차 안에서 터미널 3에 도착한 다음 홋카이도 방면 비행기로 갈아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미리 봐둔다. 그래도 당장 내리니 또 20킬로 가까이 되는 배낭을 멘 채 아내 꽁무니만 쫓아 뛰느라 정신이 없다.
ANA 탑승수속 코너에 가서 사정을 얘기해 보니 짐 부치는 건 이미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우리가 뭐 그렇지. 그런데 우리 짐 정도는 기내에 들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오. 요것들이 사람 심장 쫄깃쫄깃하게 하네. 기내 승무원과 통화해 컨펌을 받는 것만으로 또 하세월. 결국 짐을 들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혹시 기내 탑승이 안 되는 물품이 짐에 들었냐고 묻는다. 아.. 있다. 아내의 열쇠고리에 걸린 작은 주머니칼. 칼날이 2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액세서리 개념이지만 결국 뺏기고 만다.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저 칼이랑은 연이 안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배낭 안에는 10센티 길이의 칼날이 있는 주머니 칼이 있었다. 그것도 누가 봐도 온전한 칼로 보이는 모양으로, 몸체 전체가 철로 된. 그런데 보안 엑스레이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커다란 배낭과 캐리어를 들고 또다시 뛰어야 했다. 53번 게이트는 또 왜 이리 먼 건지. 탑승수속 당시 수화물 엑스레이 검사를 하는 도중에 이미 탑승 파이널 콜이 울렸었다. 이러다가 못 타면 더 낭패인데. 칼까지 뺏긴 마당인데 ㅠㅠ 그래도 일단 뛰는 걸로. 25년 전 배낭여행 이후로 이렇게 짐 들고 뛴 적은 처음인 듯하다. 구글맵으로 찍어보니 거리가 2.8킬로가 나온다. 막상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우리 앞에도 줄이 길게 서있고...
결국 이걸 타는구나. 무사히 승선을 하고 나니 이제 가방을 둘 곳이 없다.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자니 이제껏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했던 범인이라는 걸 모든 승객에게 자백하는 꼴이었다. 사방에서 눈치가 따갑다. 여기저기 메뚜기를 하다가 승무원의 도움으로 저 앞자리에 빈 곳에 짐을 옮겨 넣는다.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다친 손목이 너무 아파왔다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일단 오늘은 공항 터미널 호텔에서 일박 묵는 걸로 한다. 창밖으로 활주로가 보인다. 비행기 이륙 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도 방음이 이렇게 잘 되다니 놀랍다. 짐을 풀고 호텔 로비에서 500미리 맥주 캔을 두 개 사 온다. 홋카이도 한정 맥주 삿포로 클래식. 나중에 알고 보니 호텔 로비 자판기에서 개당 520엔에 파는 맥주를 바로 밑 편의점에서 개당 300엔도 안 되게 팔고 있었다. 이렇게 번번이 헛발질을 하는 일. 뒤통수를 맞는 일, 이게 여행이지. 첫날부터 몸이 무척 노곤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