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가 선택한 치명적인 방향의 역설
애벌레의 시간은 한없이 연약하고 부드럽다. 단단한 갑옷도, 날카로운 발톱도, 빠르게 도망칠 날개도 없는 이 말랑말랑한 몸뚱이는 숲 속 포식자들에게 그저 영양가 높고 탐스러운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작은 가시나 털로 무장하기도 하지만, 굶주린 새나 사마귀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기엔 역부족이다. 이토록 무방비한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날개를 달기 위해, 이 연약한 생명체는 숲에서 가장 치밀하고 교묘한 진화적 속임수를 빚어냈다.
바로 자신의 꼬리를 치명적인 머리처럼 위장하는 가짜머리 의태(False head mimicry) 전술이다.
이들의 위장술은 단순히 생김새를 꾸미는 것을 넘어, 포식자의 사냥 본능을 철저하게 역이용하는 행동생태학적인 기만이다.
새나 도마뱀 같은 천적은 사냥감을 덮칠 때 본능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급소인 머리를 첫 번째 타격 목표로 삼는다. 머리를 단숨에 파괴해야 피식자의 반격을 막고 도주를 원천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벌레들은 바로 이 포식자의 머리 조준 본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생명과 직결된 진짜 머리 대신 꼬리 쪽으로 공격을 유도한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기꺼이 꼬리의 살 한 점을 내어주는 처절한 표적 이동(Attack deflection) 전략이다.
시선을 꼬리로 잡아끌기 위해 애벌레들은 치밀한 시각적 유인책을 쓴다. 은재주나방 애벌레의 꼬리에 있는 뿔 같은 돌기와 험상궂은 무늬는 천적의 공격을 멈칫하게 만든다.
뾰족부전나비나 꽃무늬재주나방 애벌레에 이르면 이 유인책은 한층 더 정교해진다. 가짜 눈이나 더듬이 모양을 흉내 낸 입체적인 돌기를 꼬리 끝에 달고, 포식자의 시선이 그곳으로 수렴하도록 피부의 무늬와 선을 섬세하게 배열하여 부리의 방향을 완벽하게 꼬리로 이끈다.
여기에 기생재주나방 애벌레가 보여주는 생생한 기만술은 단연 압권이다. 꼬리 말단부에 달린 돌기를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허공을 향해 날름날름 움직이며 시선을 빼앗는다.
심지어 가짜 머리의 입처럼 보이는 부위를 쩍 벌리더니 그곳으로 배설물을 툭 밀어내는 기막힌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포식자의 눈에는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진짜 머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속임수는 형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포식자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하는 행동적 기만까지 서슴지 않는다. 진짜 머리는 잎사귀 아래나 몸통 밑으로 안전하게 웅크려 숨긴 채, 가짜 머리인 꼬리를 빳빳하게 쳐들고 마치 주변을 경계하듯 이리저리 흔든다.
천적이 다가오면 이 가짜 머리를 더욱 활발히 움직여 공격의 표적을 꼬리 쪽에 완전히 고정시켜 버린다.
가장 기막힌 반전은 공격이 적중하는 찰나에 완성된다. 새가 완벽한 속임수에 속아 가짜 머리를 강하게 쪼는 순간, 포식자의 뇌는 당연히 사냥감이 그 가짜 머리가 향하는 뒤쪽으로 도망칠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예측한다. 하지만 애벌레의 진짜 머리는 이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꼬리를 물리는 아주 짧은 순간, 애벌레는 포식자의 예상 경로와 정반대인 앞으로 쏜살같이 전진하거나 잎사귀 아래로 툭 떨어져 버린다. 포식자의 시각적 인지 오류를 유도하고 도주 방향의 착각까지 철저하게 계산해 낸 완벽한 방향의 역설이다.
애벌레 시기의 험난한 생존 투쟁을 넘어 무사히 우화에 성공한 성충의 의태 완성도는 한층 더 높아진다. 대표적인 예가 녹색부전나비류가 날개에 새긴 가짜 머리다. 뒷날개 끝에 더듬이를 꼭 닮은 가느다란 미상돌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진짜 눈처럼 보이는 선명한 점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나비들이 앉아서 뒷날개를 비비며 미상돌기를 움직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살아있는 머리다. 포식자가 이 가짜 머리를 진짜로 착각하고 공격하면, 나비는 포식자의 예상과 정반대 방향인 앞쪽으로 가볍게 날아오른다. 애벌레가 보여준 방향의 역설이 성충 단계에서도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방어 전략의 성공률이 더욱 높은 이유는 희생의 대가가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애벌레는 꼬리의 살점을 뜯겨야 하지만, 나비는 날개 끝자락이 조금 떨어져 나가는 정도의 손실만 입는다. 날개 일부가 상하더라도 비행하고 짝을 찾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생존을 위한 가장 영악하고 경제적인 속임수인 셈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몸으로 험난한 숲의 포식자들을 견뎌내고 날개를 펼치기까지. 이들이 꼬리와 날개 끝에 공들여 조각하고 연기해 내는 가짜 머리는,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써 내려간 가장 치열하고 눈물겨운 진화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