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여치베짱이

겨울을 견뎌낸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봄의 노래

by Eco archivist

겨울이 깊어갈수록 마음 한구석은 다가올 봄에 만날 멋진 곤충들을 향한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다. 대부분의 곤충에게 겨울은 알이나 번데기의 형태로 흙이나 나무껍질 틈에 숨죽여 견뎌야 하는 혹독한 계절이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섭리를 거스르고 연약한 맨몸으로 눈보라를 버텨내는 녀석들이 있다.

각시메뚜기나 좀매부리, 그리고 봄밤의 정적을 깨는 꼬마여치베짱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성충의 모습으로 체내 수분을 줄이고 부동액 같은 물질을 채워 넣어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기나긴 겨울을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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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메뚜기(左), 좀매부리(中), 꼬마여치베짱이(右)

그렇게 매서운 계절을 맨몸으로 건너온 꼬마여치베짱이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 본격적인 곤충 탐사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전령사다. 남들이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날 무렵 당당하게 무대를 장악하며 한 해의 탐사 시즌이 시작되었음을 노래하는 이 녀석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각별하고 의미가 깊다.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진도의 어느 봄밤이었다. 고압선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찌이이-' 하는 날카롭고 강렬한 마찰음이 수백 미터 밖에서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이름에 붙은 '꼬마'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울음소리에 흠칫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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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꼬마여치베짱이 수컷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 렌즈를 바짝 들이대고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른 잎사귀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갈색빛의 통통한 체형은 영락없이 몸을 웅크린 새우를 연상시켜 묘한 귀여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렌즈 너머로 정면에서 마주한 녀석의 얼굴은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된다. 입 주변부터 가슴판까지 짙게 물든 검은 얼굴은 마치 단단한 투구를 쓴 전사처럼 다가온다.

매서운 겨울을 맨몸으로 이겨낸 생명체 특유의 강인함과 독특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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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쩌렁쩌렁한 울음소리와 강렬한 인상을 가졌음에도, 녀석은 여치류치고는 뒷다리가 유난히 짧아 도약력이 턱없이 약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억새밭이라는 서식 환경과 녀석들의 독특한 생활사에 완벽하게 맞춰진 진화의 결과이다.

초목이 빽빽하게 밀집된 억새 덤불 속에서 시야 확보 없이 무작정 뛰어오르는 것은 곳곳에 널린 천적의 덫에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녀석들은 위협을 느꼈을 때 높이 뛰어오르는 대신, 억새 줄기에 몸을 바짝 밀착한 채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지듯 기어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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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여치베짱이 암컷


뛰기를 포기한 대신 녀석들은 완벽한 은폐를 선택했다. 마른 억새잎과 비슷한 갈색 몸통을 줄기에 밀착시키면 훌륭한 위장이 되는데, 이때 크고 굵은 뒷다리는 오히려 튀어나온 실루엣을 만들어 천적의 눈에 띄게 할 뿐이다. 여기에 성충으로 겨울을 나는 녀석의 생태적 특징도 한몫했을 것이다.

새나 양서파충류, 거미 같은 주요 포식자들의 활동이 뜸해지는 한겨울과 이른 봄에 주로 활동하다 보니, 굳이 많은 에너지를 들여가며 도약을 위한 거대한 다리 근육을 유지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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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녀석들은 그 에너지를 소리에 집중했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짝을 찾는 대신, 안전한 덤불 깊숙한 곳에 웅크린 채 거대한 스피커처럼 쩌렁쩌렁한 소리를 내어 암컷을 불러들이는 지극히 영리하고 효율적인 생존 전략을 완성한 것이다.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남부지방에 몰려 있어 각별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마주치기 어렵지만, 한 번 울음소리를 귀에 익히고 나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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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여치베짱이 약충


본래 남방계 곤충이지만 지역에 따라서 중부 해안지역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2025년 봄, 충남 태안에서 꼬마여치베짱이의 강렬한 울음소리를 마주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주도, 진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소리가 꽤 먼 북쪽 지역인 태안의 억새밭까지 당당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M6250321 꼬마여치베짱이 태안.jpg 태안의 꼬마여치베짱이(2025년 6월)


가을 풀벌레들이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면, 꼬마여치베짱이의 노래는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란한 승전보이자 새로운 생태 기록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와 같다.

아무도 풀벌레 소리를 기대하지 않는 낯선 봄밤,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녀석의 열창은 단순한 구애를 넘어선 치열한 생존과 거침없는 확장의 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