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주잠자리

함정을 거부하고 전진하는 모래사장의 제왕

by Eco archivist

이름 앞에 '왕'이라는 수식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곤충이 또 있을까. 국내에 분포하는 명주잠자리 무리 중 명실상부 제왕이라 불리는 왕명주잠자리는 성충과 유충 모두 다른 종들과 비교를 거부하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한다.

영미권에서는 명주잠자리 유충을 '앤트라이언(Antlion)', 즉 개미를 사냥하는 사자라고 부른다. 곤충계의 맹수라는 그 거창한 이름조차 이 거대한 왕명주잠자리 앞에서는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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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성충
GZ0_51052 왕명주잠자리 비교샷.jpg 왕명주잠자리와 맵시명주잠자리 유충 비교


우리가 흔히 '개미귀신'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명주잠자리 애벌레를 떠올리면, 모래밭에 움푹한 고깔 모양의 함정을 파놓고 그 밑에 숨어 먹잇감이 미끄러져 떨어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동적인 사냥꾼의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를 지닌 왕명주잠자리 애벌레의 생태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고정관념은 단숨에 무너진다. 이들은 굳이 수고스럽게 '개미지옥'이라는 함정을 만들지 않는다. 함정을 파지 않는 대신, 이들은 모래 속에 자리를 잡고 곤충이 모래 위를 걸을 때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을 정확하게 감지해 낸다.

보이지 않는 밖의 상황과 먹잇감의 위치를 진동만으로 완벽하게 읽어내는 정밀한 레이더를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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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속에 자리를 잡은 왕명주잠자리(左), 왕명주잠자리 먹이활동 흔적(右)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녀석들의 기동성이다. 보통의 개미귀신들은 신체 구조상 평생 뒷걸음질밖에 치지 못한다. 함정이라는 수동적인 사냥 방식은 어쩌면 이 빈약한 기동성이 만들어낸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명주잠자리 유충은 이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앞으로' 걸을 수 있다. 먹잇감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모래를 박차고 앞으로 돌진하여 거대한 큰 턱으로 덮친 후에야 비로소 뒷걸음질을 쳐서 모래 속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간다. 어두운 밤이 되면 아예 모래밭 위를 전진하며 배회하기도 한다.

트랩을 쳐놓고 기다리는 소극적인 굴레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맹수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처럼 모래 위를 거침없이 전진하며 포식하는 압도적인 모습이야말로 녀석이 '모래밭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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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종령


사냥용 트랩을 만들지 않으니 녀석을 찾는 일은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해변의 모래밭에서 이 맹렬한 포식자를 찾아내는 방법은 의외로 직관적이다.

바로 녀석이 앞으로 전진하며 모래 위에 남긴 궤적을 뒤쫓는 것이다. 포유류도 아닌 곤충을 발자국으로 추적하여 찾아낸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낯설고 특이한 경험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서구권에서는 명주잠자리 유충을 '두들버그(Doodlebug)'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모래 위를 기어 다닐 때 남기는 꼬불꼬불한 궤적이 마치 낙서(Doodle)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곤충을 발자국으로 추적하는 낭만적인 일이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꽤나 친숙한 일상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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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의 발자국


사실 이 녀석은 아주 오랫동안 위시리스트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종이었다. 녀석을 만나기 위해 수차례 해변의 모래사장을 뒤지며 허탕을 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마침내 모래 위에 남겨둔 낙서 같은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궤적이 끊긴 지점 주변의 모래를 조심스레 파내어 유충을 만났던 순간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녀석은 밖으로 드러난 순간 겁을 먹고 숨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의 손마저 덥석 물어버리는 대담함까지 보여주었다. 거침없는 사냥 본능과 두려움 없는 그 포악함을 마주하고 나니 과연 곤충계의 사자이자 모래밭의 제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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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종령


귀하게 얻은 만남인 만큼 조심스레 녀석을 데려와 직접 사육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흙 속에서 은밀하고도 맹렬한 포식자로 군림하던 거대한 애벌레는 보살핌 속에서 무사히 번데기 과정을 거쳤고, 이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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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고치와 번데기


어릴 적의 우락부락한 외모는 온데간데없고, 투명한 명주천을 짜 놓은 듯 우아하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성충으로 우화한 것이다. 다른 종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거대한 날개로 밤하늘을 나풀나풀 유영하는 성충의 우아함과 모래 위로 당당히 전진하며 사람 손까지 물어버리던 유충 시절의 맹렬함.

이 극단적인 대비야말로 사육을 통해 온전히 지켜본 왕명주잠자리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반전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는 대신 거친 모래밭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이 거대한 제왕의 생존 방식은 미처 몰랐던 자연의 또 다른 경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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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성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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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주잠자리 초기 유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