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거미

낭만적 동거 끝에 찾아오는 비장한 희생

by Eco archivist

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관심을 가져볼 법한 외모를 가진 거미가 있다. 산의 초지나 해안의 모래사구를 걷다 보면 마치 붉은 무당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생명체. 영명이 '무당벌레거미(Ladybird spider)'인 주홍거미이다. 수컷 주홍거미가 이토록 무당벌레와 똑 닮은 치장을 한 데에는 생존을 위한 기막힌 전략이 숨어있다.

자연계에서 무당벌레는 위협을 느끼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노란 체액을 내뿜어 포식자의 입맛을 떨어뜨리기로 유명하다. 새와 같은 천적들은 이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벌레를 건드리면 나쁜 경험을 한다는 것을 학습을 통해 알고 피하게 된다.

수컷 주홍거미는 바로 이 점을 영리하게 이용해, 맛없고 독성 있는 무당벌레의 모습으로 위장함으로써 훤히 노출된 땅 위를 돌아다니면서도 포식자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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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거미 수컷


반면 암컷의 모습은 수컷과 전혀 다르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칠흑 같이 짙은 색에 몸집은 수컷보다 훨씬 크고 투박하다.

화려한 수컷이 번식을 위해 땅 위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동안, 암컷은 은밀하고 어두운 땅속이나 바위틈에 굴을 파고 그 주변에 거미줄을 쳐둔 채 조용히 사냥감을 기다린다. 하늘에 정교한 그물을 치는 일반적인 거미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이다.

사냥 무기 또한 특별하다. 보통의 거미들이 끈적이는 점액질로 먹이를 잡는다면, 이들은 점액이 전혀 없는 털실이나 벨크로 같은 미세한 거미줄(cribellate silk)을 엮어낸다. 끈적이지는 않지만, 이 촘촘한 그물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의 단단한 관절과 털에 억세게 엉겨 붙어 무시무시한 사냥 덫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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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거미 암컷


이들의 짝짓기 과정은 외모만큼이나 흥미롭다. 짝을 찾아 암컷의 굴로 들어온 수컷은 교미할 때 암컷의 배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독특한 자세를 취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미 후의 모습이다.

거미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짝짓기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동종포식의 비극은 이들에겐 남의 이야기다. 오히려 교미를 마친 암수는 일정 기간 같은 땅속 은신처에서 평화롭게 동거하는 낭만적인 습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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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거미 짝짓기와 동거


이 낭만적인 동거 이후, 땅속 은둔자의 삶에서 가장 돋보이는 비장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알을 낳은 암컷은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본다.

알에서 깨어난 어린 거미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만찬은 다름 아닌 어미 자신의 몸이다. 어미는 기꺼이 새끼들에게 자신의 체액과 몸을 내어주고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쳐 다음 세대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이 지독한 모성은 주홍거미의 삶을 단순한 포식자 이상의 경이로운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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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거미 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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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거미 유체들의 모체포식 흔적


과거에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던 이 거미는, 현재 무분별한 채집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개체수가 급감하여 멸종 위협을 받고 있다.

오랫동안 국내의 주홍거미과는 주홍거미(Eresus kollari) 단 한 종만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외형이 매우 흡사한 또 다른 종(Eresus granosus)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존에 알려진 주홍거미는 주로 강원도 정선이나 평창 같은 산간 내륙의 초지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새롭게 확인된 종은 충남 태안과 같은 해안가 모래사구 지역을 은신처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내륙 산림의 초지와 해안의 모래언덕이라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숭고한 생태를 이어가고 있는 이 두 종의 주홍거미가 영영 사라지지 않도록 서식지 보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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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만난 주홍거미(Eresus koll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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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에서 만난 주홍거미(Eresus grano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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