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알락명주잠자리

함정을 버리고 배경이 된 사냥꾼

by Eco archivist

명주잠자리라 하면 흔히 모래 구덩이 속의 ‘개미지옥’을 떠올리지만, 애알락명주잠자리의 생애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쓰여 있다. 이들의 유충은 함정을 파지도, 먹잇감을 쫓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묵묵히 기다리는 법을 택했다. 바위나 나무줄기에 붙은 지의류(地衣類) 사이로 몸을 숨기고, 마치 그 자신이 지의류의 일부인 양 완벽하게 위장한 채 지나가는 생명을 기다린다.

스스로를 배경 속에 지워버리는 은둔의 방식, 그것이 이들이 유년을 견디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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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잠자리 개미지옥(左), 애알락명주잠자리 유충(右)


처음 이 종을 찾아 나섰던 날들을 기억한다. 산의 거암마다 붙어 있는 지의류를 샅샅이 훑으며 헤맸지만, 녀석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지의류의 미세한 굴곡을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도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던 막막한 시간들. "정말 이곳에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녀석들의 위장은 완벽했고, 때로는 무력감마저 안겨주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쌓였고, 빛이 도달하는 시간, 이끼와 지의류가 머금은 적정한 습도 등을 깨달은 후에야 녀석들은 비로소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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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알락명주잠자리 유충 2개체(左), - 애알락명주잠자리 유충(右)


유충을 만나고 나니 성충이 궁금해졌지만 그 또한 쉽지는 않았다. 산행 길에 흔히 마주치는 명주잠자리와는 달리, 이들의 성충은 지독하리만큼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 은밀한 자태를 보기 위해 한 때는 사육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생의 습도를 완벽히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고, 예민한 녀석들은 먹이조차 제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수차례의 실패 끝에 고치를 만드는 5월경에 고치를 채집하여 우화시키는 방법이 주효했고, 이후에 야간 등화에도 날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GJH_9610 애알락명주잠자리 고치.jpg 애알락명주잠자리 고치(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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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잠자리(左), 애알락명주잠자리(右)


국명에 붙은 '애'라는 글자가 암시하듯, 성충은 다른 명주잠자리들에 비해 유난히 작고 여린 자태를 지녔다. 손대면 바스러질 듯 가냘픈 날갯짓을 보고 있으면, 이 작은 생명이 거친 바위 위에서 지의류의 옷을 입고 매서운 사냥꾼으로 군림했던 그 시간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GJH_9777 애알락명주잠자리.jpg 애알락명주잠자리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작고 가녀린 생명이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생존의 전략은 그 어떤 대형 포식자보다 치열하고 정교하다.

산을 오르다 무심코 지나치는 거암의 지의류들을 조금 더 깊은 애정을 담아 들여다보길 권한다.

보이지 않던 무늬가 비로소 생명의 형체로 읽히는 그 순간, 당신 또한 이 놀라운 위장의 대가를 마주하는 뜻밖의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G1010252.jpg 애알락명주잠자리 유충의 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