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록, 일렉트로니카가 한자리에
조직, 집단이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음악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리를 이룬 뮤지션들이 대체로 큰 힘을 발휘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카인 메어하이트 퓌어 디 미트라이트(Kein Mehrheit Für Die Mitleid, KMFDM)는 독일 인더스트리얼 록의 발전과 확산을 이끈 모임으로 평가받으며, 봄 더 뮤직 인더스트리(Bomb the Music Industry!)는 펑크의 강령인 ‘두 잇 유어셀프’를 항시 실천하며 미국 언더그라운드 펑크의 주요 움직임으로서 단단히 지위를 굳혔다. 브로큰 비트의 성장을 꾀한 디제이 연합 버그즈 인 디 애틱(Bugz in the Attic), 표현과 음악의 독특함으로 힙합과 R&B에 신경향을 제시한 오드 퓨처(Odd Future Wolf Gang Kill Them All, OFWGKTA)도 위력을 떨친 집단에 해당한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집합체는 결합만으로도 이슈가 되며 협력과 보완을 통해 인상적인 활약을 남긴다.
일렉트로니카 신에서는 그러한 인물로 알에이시(RAC)를 꼽을 수 있다. 리믹스 아티스트 컬렉티브(Remix Artist Collective)의 이니셜로, 2007년 1월 포르투갈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드레 앨런 안조스(André Allen Anjos)를 주축으로 브루클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프로듀서 앤드루 모리(Andrew Maury), 포틀랜드 출신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칼 클링(Karl Kling)이 모여 만든 이 그룹은 200편이 훌쩍 넘는 다량의 리믹스 작업으로 업계에서 빠르게 인지도를 높였다. 이들은 킹스 오브 레온(Kings of Leon)의 'Use Somebody', 유투(U2)의 'Magnificent', 라디오헤드(Radiohead)의 'Nude',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의 'Blue Jeans'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선곡, 오리지널과 차별화되면서 흥미로운 편곡을 느낄 수 있는 리믹스 본연의 가치에 중점을 둔 해석으로 음악팬들에게 어필했다. 왕성하고도 독보적인 작업 때문에 그룹의 형광색 로고는 이제 많은 이에게 익숙하다.
본격적인 활약은 2008년에 시작됐다. 리믹스의 기치 아래 합심한 청년들은 라 라 라이어트(Ra Ra Riot)의 'Manner to Act', 블록 파티(Bloc Party)의 'Hunting for Witches' 등을 색다르게 편곡한 비정규 편집 앨범 [RAC Vol. 1]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 같은 인기 비디오게임들의 주제가를 단단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꾸민 EP [Nintendo Vs. Sega]를 통해 언더그라운드 신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여러 편의 독자적인 리믹스 음반을 출시하고 인디 밴드들의 노래를 윤색함으로써 화려한 경력을 구축해 갔다. 2012년에는 안드레의 부인 리즈 안조스(Liz Anjos)가 객원 보컬로 참여해 카디건스(The Cardigans)의 'Lovefool',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Something About Us' 등을 부른 리메이크 음반 [All Covers]를 선보이며 작품 세계를 한 단계 확장했다. 멜로디와 리듬의 화합은 물론 새로 부르는 보컬까지 골고루 신경 써서 조율해야 하는 리메이크에의 도전은 기능적 성숙을 이룬 발판이었다.
한편으로 [All Covers]는 일대 변화를 암시한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2012년을 전후로 그동안 협업하던 동료들이 개인 활동으로 빠지게 되면서 원래 알에이시의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안드레 앨런 안조스가 창작곡으로 운영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All Covers]를 내기 약 두 달 전인 2012년 5월에 출시한 첫 창작곡 'Hollywood'도 일련의 상황을 배경에 두고 있다. 리믹스로 유명한 뮤지션이 오리지널 곡을 썼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간 드러낸 스타일과 딴판으로 팝 록을 들려준다는 점도 사람들을 의아하게 할 요인이었다. 화이티스트 보이 얼라이브(The Whitest Boy Alive)나 후지야 앤 미야기(Fujiya & Miyagi) 같은 밴드의 몇몇 노래를 연상시키는 기타 팝의 등장은 팬들로서는 생경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2013년 9월에 낸 EP [Don't Talk To]로 이어진 변신은 무척 강렬했다.
새로운 노선을 분명하게 선언한 안드레는 지난 3월 초에 정규 1집 [Strangers]의 일부분과 트랙리스트를 공개하며 음악팬들을 설레게 했다. 귀가 끌리는 캐주얼한 스타일도 매력이지만 참여 아티스트의 명단 또한 호화롭다. 테건 앤 사라(Tegan and Sara), 도쿄 폴리스 클럽(Tokyo Police Club), 스피크(SPEAK), 케이티 헤어지그(Katie Herzig) 등 국내에서도 유명한 신스팝, 인디 록 뮤지션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 대단한 결과는 알에이시가 펼쳐 온 리믹스 작업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설명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또한 주변의 많은 동료가 선뜻 참여했다는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안드레의 음악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Strangers]는 풀 앨범에 대한 기대감은 물론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두텁게 해 준다.
이미 다수의 마니아가 EP와 [Strangers Part 1]을 통해서 만족감을 얻었을 것이다. 블록 파티의 보컬 켈리 오케릭(Kele Okereke)과 엠엔디알(MNDR)이 부른 'Let Go'는 청량음료처럼 톡 쏘는 시원함을 안겼다. 현악기의 활을 사납게 문질러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는 도입부를 지나면 바삭바삭한 리듬으로 가벼운 느낌을 제공한다. 거기에 엠엔디알이 맡은 후렴은 한 번만 들어도 바로 흥얼거려지는 경쾌한 멜로디로 강한 중독성을 형성한다. 살랑거리는 신시사이저와 보디랭귀지(Body Language)의 발랄한 보컬이 아기자기함을 발산하는 'Ello Ello', 피아노, 기타, 현악기로 구성된 반주가 무척 화사하게 들리는 'Hard to Hold', 티 렉스(T. Rex)의 'Get It On'이 떠올려지는 멜로디와 편성으로 친숙하게 다가오는 쟁글 팝 'Tear You Down' 등 명랑한 기운이 계속된다. 불편한 과잉 없는 즐거움이 전반에 서려 있다.
두 번째 파트로 마련해 둔 후반부의 노래들에서도 훈훈한 생기가 이어진다. 'Seventeen'은 청명한 실로폰 소리와 곳곳에서 분할되는 드럼 연주로 활력을 내고, 'All I Got'은 라틴 리듬의 은은한 삽입으로 차분하게 춤추기에 좋은 판을 만든다. 예스러운 신스팝 사운드의 복구가 1980년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405', 보컬을 잘라 연결한 신시사이저 루프와 ‘아’ 모음을 거듭하는 가사가 인상적인 'Cheap Sunglasses'도 유쾌함을 배가한다. 몽환적인 그림처럼 느껴지는 일렉트로팝 'Ready for It'과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와 그에 맞춘 보컬의 변화 덕분에 뮤지컬을 보는 듯한 'We Belong'이 다른 노래들에 비해 톤이 조금 낮지만 그렇다고 선명하게 대비되는 선을 긋지는 않는다. 곱고 밝은 공기의 보존은 듣는 이로 하여금 파스텔컬러, 산들바람 같은 흐뭇한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약 1년 동안 궁금증을 유발한 알에이시의 정규 음반은 실로 놀라움의 연속이다. 전자음악에 머물 것 같던 이가 록을 소화하고 리믹스가 전부일 것만 같았던 뮤지션이 창작곡을 선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단지 활동과 장르의 변화뿐만 아니라 흡인력 있는 멜로디를 써서 재능 있는 싱어송라이터임을 입증하고 있기에 더욱 경탄할 만하다. 유년 시절 펑크 록과 헤비메탈에 심취했던 이력과 디제이, 리믹스 아티스트로서의 프로 경험이 훌륭한 결과를 빚어냈다. 예전과 달리 이제 안드레 앨런 안조스 혼자 알에이시를 꾸려 나가게 됐지만 집단으로 움직였을 때와 차이 없는 위력이 나타난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Strangers]는 2014년 팝, 록, 일렉트로닉 신의 빛나는 수확이다.
2014/03
며칠 전에 확인할 게 있어서 RAC의 이 음반을 다시 들었다. 앨범을 검색하다가 5월에 새 앨범 [Boy]를 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이번 앨범도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