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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Jan 20. 2021

1990년대 추억의 걸 크러시 그룹들

열에 일곱은 청순, 발랄이다. 그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는 대체로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색정을 부추긴다. 물론 이따금 아주 독특한 콘셉트를 내세운 팀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걸 그룹의 양태는 순수함-귀여움 아니면 섹시함, 이 두 가지로 양분되는 편이다.


1990년대는 달랐다. 당시에는 힙합과 유로댄스가 크게 번성했다. 이런 장르들을 택해 걸 그룹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모습 대신 강하거나 어두운 기운을 표출한 팀도 여럿 됐다. 요즘 많이 쓰이는 '센 언니'나 '걸 크러시' 같은 수식의 원조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현을 이어 나갔다.


원조 중에 원조

이 계보는 1997년 베이비복스(Baby V.O.X)로 시작된다. 이들 역시 댄스음악을 주메뉴로 삼긴 했으나 래핑에도 적잖은 비중을 두면서 기존 걸 그룹과 차별화했다. 1집 중 타이틀곡 '남자에게 (민주주의)'에 이어 두 번째로 방송을 탄 '머리 하는 날'은 드럼 소리를 부각한 힙합풍의 반주로 그룹을 더욱 강렬해 보이게끔 했다.


안타깝게도 베이비복스의 남다른 특색은 빛을 보지 못했다. 가사가 그리 대중적이지 못했으며, 음악적 완성도도 떨어졌다. 이들처럼 센 음악을 하는 여성 그룹이 거의 전무했던 탓에 낯설게 느껴진 것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다. 5인조라는 점과 힙합을 한다는 사항에서 비롯된 H.O.T.와의 비교, 이로 인해 발생한 음악팬들의 반감도 흥행 부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베이비복스는 이듬해 낸 2집에서 귀여움으로 콘셉트를 변경하면서 1집 때 경험하지 못한 환대를 받았다. 이들보다 늦게 데뷔했지만 히트는 먼저 이룬 S.E.S.와 핑클이 조성한 걸 그룹의 이상적인 상(像)에 부합한 결과다. 각각 김형석, 주영훈이 작곡한 타이틀곡 '야야야'와 후속곡 'Change'가 지닌 대중성과 준수한 모양새도 성공에 큰 동력이 됐다.


베이비복스는 1999년 'Get Up'과 'Killer'로 순항을 지속한다. 특히 1년 전 출시된 김현성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Killer'로는 여성스러움과 성숙함, 터프함을 함께 나타냄으로써 한 번 더 색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남성 팬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순간이다.

자막의 장르 설명이 '갱스터 디스코'란다. 허허허... 그게 뭐야;;


Sporty and Active

같은 해 데뷔한 트리오 디바(Diva)도 베이비복스와 마찬가지로 힙합 스타일의 댄스음악을 노선으로 택했다. 농도를 따지면 베이비복스보다 힙합 성분이 훨씬 짙었다. 그럼에도 디바는 베이비복스와 다르게 마수걸이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데뷔 앨범은 출시 두 달 만에 2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베이비복스의 데뷔는 7월, 디바의 방송 데뷔는 9월로, 단 2개월 만에 상반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디바가 성공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지도였다. 룰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채리나가 있었기에 대중의 시선을 끌기가 수월했다. 멤버 지니가 김성재의 솔로 데뷔곡 '말하자면'에서 백업 댄서로 활동했다는 사실도 음악팬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말쑥한 음악은 디바를 곧장 스타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기중기가 돼 줬다. 데뷔곡 '그래', 2집의 'Joy', 3집 타이틀곡 '고리 (Yo Yo)' 등 디바의 노래들은 대부분 구성이 튼튼했다. 또한 힙합 느낌을 선명하게 내비치면서 경쾌함도 갖춰서 흑인음악 마니아와 일반 음악팬의 호응을 골고루 얻을 수 있었다.


지난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이성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등 가사는 여느 사랑 노래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멤버들의 래핑이 카랑카랑하고 힘이 넘쳐서 드세 보이는 효과를 냈다. 데뷔 초반 비키와 지니의 가창은 프로페셔널이라고 하기 민망할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디바는 지금까지 걸 그룹에게서 볼 수 없었던 자유분방함을 한껏 풍겼다.


패션도 '쿨한 언니'처럼 보이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로 활동할 때는 큼지막한 사이즈의 힙합 패션으로 남자 같은 이미지를 내보였다. '고리 (Yo Yo)' 때 치마를 입긴 했으나 익스트림 스포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해 활동적인 느낌도 동반했다. 청순과는 거리가 먼 복장으로 디바는 걸 그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어찌 보면 '채리나와 아이들'이다. 비키와 지니의 목소리는 마구 갈라진다. 27초 카메라맨이 움직이다가 넘어졌나 보다.


음악은 좋았는데

베이비복스는 히트에는 다다르지 못했으나 5인조 포맷, 괴상한 가사로 나름대로 분명한 인상을 남겼다. 2집부터는 탄탄대로를 달렸으니 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이비복스보다 몇 주 앞서 나온 트리오 이뉴(enue)는 음악방송에 몇 번 출연한 뒤 가요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재미교포 자매 이아영, 이현영과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이진경으로 이뤄진 이뉴는 R&B를 주력 장르로 한다는 점 때문에 '여성 솔리드'로 소개되곤 했다. 1997년 출시된 이들의 데뷔 앨범은 매끄러운 R&B, 어덜트 컨템포러리 노래들로 구성돼 본토의 맛을 그럴싸하게 전달했다. 음악을 들으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시기와 정서였다. 타이틀곡 '독립선언'은 뉴 잭 스윙을 근간에 둔 펑키한 R&B 골격을 지녔다. 흥겹긴 해도 당시 가요계에서는 이런 노래가 흔하지 않았다. 음악팬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 스타일 탓에 이뉴는 순식간에 가요계에서 퇴장당하고 만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성 흑인음악 그룹은 활황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음원사이트에 음원이 있어서 다행이다.


시작은 힙합이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디바의 성공은 음반 제작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 탄력으로 나온 팀 중 하나가 오투포(O-24)다. 어떤 이들에게는 미녀 영어 강사 안미정이 속했던 그룹으로 익숙할 것이다. 오투포는 데뷔 앨범 제목을 [Live in Hip Hop]으로 지어 힙합의 색채가 진함을 강조했다. 타이틀곡 '뒤집어 (자유)'는 강한 비트의 힙합이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후속곡이었던 소녀풍의 가벼운 댄스곡 '첫사랑'과 '몰라 몰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흔히 '댄스 브레이크'라고 칭하는(정식 표현이 없다.) 춤만 추는 간주 부분에서 뜬금없이 프리즈를 선보였다(1분 48초). 저렇게 긴장감 없고 무력한 프리즈는 처음이었다.


우리 X세대를 위해

새천년으로 달력을 넘기기 전 데뷔한 4인조 폭스(F.O.X: For Our X-Generation)는 오투포처럼 '힙합적'이었다. 데뷔 앨범 [Rul-Ing]에는 댄스곡이 많긴 했으나 타이틀곡 'Jumping Love 1'은 어두운 톤의 힙합이었다. 윤희중과 미스터 타이푼의 지도를 받아 래핑도 신경 썼다. 인트로만 들으면 1980년대 후반 서부 갱스터 랩 음반을 듣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Jumping Love 2'는 미국 라티노 힙합 그룹 델린퀀트 해비츠(Delinquent Habits)의 'Tres Delinquentes'를 차용해 힙합의 느낌을 또 한 번 강하게 냈다.


애석하게도 여성으로만 이뤄진 힙합 그룹은 환영받는 세상이 아니었다. 힙합으로 재미를 보지 못한 폭스는 그나마 가볍게 느껴지는 댄스음악 '그래도 태양은 다시 뜬다'를 후속곡으로 민다. 이때 한 멤버가 'Jumping Love 1'에 이어 '그래도 태양은 다시 뜬다'를 부를 때에도 무대에서 지팡이를 휘두름으로써 끝까지 거친 분위기를 고수했다. '여자 이현도'를 보는 듯했다.

제목만 보면 뻔한 사랑 얘기 같지만 사회비판적인 내용이다. 2분 10초 지팡이를 돌리는 멤버의 동작은 당구장 큐를 움직이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한류 열풍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복스도, 걸 그룹 중 가장 많은 정규 앨범을 낸 디바도 활동을 접은 지 오래다. 하지만 저마다의 개성으로 걸 그룹의 색다른 면을 구축한 공은 뚜렷하다. 현재 '걸 크러시'라는 표현이 붙는 걸 그룹들은 이들에게 약간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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