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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Jan 05. 2020

2019 가요계 스케치

올 한 해 가요계를 장식한 이런저런 인물과 일들

글을 무겁게 열 수밖에 없다. 2019년 가요계는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승리의 버닝썬 게이트를 시작으로 정준영, 최종훈 등의 불법 촬영 범죄, 학교 폭력 폭로, 음원 사재기 의혹, <프로듀스 101>을 비롯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순위 조작 문제, 설리와 구하라의 극단적인 선택 등 좋지 않은 사건이 계속해서 터졌다. 가요계는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암담한 일만 빼곡하지는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중음악 시장은 활발하게 돌아가며 음악팬들에게 즐거움과 설렘을 선사했다. 여전히 근사한 음악이 나왔으며, 여기저기서 재미와 가치를 아우르는 움직임이 일어나 가요계에 긍정적인 기운을 주입해 줬다. 내년은 올해보다 기쁜 소식이 많이 들리길 희망하며 2019년 가요계를 되돌아본다.


지금 가요계는 '추억앓이' 중

올해 가요계를 장식한 여러 키워드 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1990년대'다. 지상파 방송국들은 그 시절 방송했던 음악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다시 내보냈다. 중년 음악팬들이 이 채널에 대거 몰리며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JTBC는 과거에 인기를 얻었다가 사라진 가수를 소개하는 <슈가맨> 세 번째 시즌을 편성해 90년대 가요 재조명에 합세했다.


젊은 가수들도 90년대에 유행했던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이며 복고 열기를 키웠다. 치즈, 스텔라장, 러비, 박문치 네 여성 싱어송라이터는 프로젝트 그룹 치스비치를 결성해 S.E.S., 핑클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준(JUNE)의 '오늘밤은', 이짜나언짜나의 '나 때는 말이야', 리썬의 'YOUTUBE', 딘딘의 'Delight' 등은 90년대에 인기를 끈 R&B의 하위 장르 뉴 잭 스윙을 골격으로 택해 90년대 복원에 일조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도 4년 만에 새 앨범 [RE_vive]를 발표하며 음악팬들을 90년대로의 여행에 불러들였다. 리메이크로 구성한 이번 음반에 베이시스의 '내가 날 버린 이유', god의 '애수', 엄정화의 '초대' 등 90년대에 나온 노래를 다수 수록한 덕이다. 당시 번화가에 가면 크게 울리던 추억의 히트곡들이 새로운 옷을 입었다.


여전히 건재한 1990년대 가수들

90년대에 활동했던 가수들 모두가 흘러간 시간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도 건재함을 뽐낸다. 그중 하나가 god다. 2014년 데뷔 15주년을 맞아 완전체로 컴백했던 다섯 남자는 올해 20주년 기념 스페셜 앨범 [THEN & NOW]를 출시하며 또 한 번 팬들과 귀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전성기를 그대로 옮겨 온 듯 특유의 푸근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세련미도 내보이는 음악은 팬들에게 멋진 선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핑클은 JTBC <캠핑클럽>에 출연해 소탈하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안겼다. 십수 년 만에 네 멤버가 한자리에 모인 것도 진귀한 일인데 방송이 끝날 무렵 신곡 '남아있는 노래처럼'을 발표해 팬들의 기쁨은 더 커졌다. 네 멤버가 지은 노랫말은 우정 일기 같이 예쁘장했으며, 김현철이 쓴 멜로디는 90년대 특유의 수수한 느낌을 지녀 노래를 정겹게 느껴지도록 했다. 이로써 팬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핑클을 만날 수 있었다.


정혜선도 반가운 이름이다. 1989년 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뒤 하나음악을 통해 정식 데뷔한 그녀는 독특한 음색, 여러 장르를 오가는 자유분방함으로 언더그라운드 음악 애호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 아쉬워한 이가 많았다. 작년 EP [시공초월]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엔진을 재가동한 그녀는 록('소용돌이'), 일렉트로니카('쳇바퀴'), 발라드('마지막 소원') 등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함으로써 '정혜선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식상함을 날린 새로운 오디션

시청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방송을 본 많은 사람이 똑같이 반응했다. "우리나라에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어?" JTBC <슈퍼밴드>는 강호에서 암중비약하는 실력자들이 서로 다른 팀을 이루며 멋진 공연을 선보여 매회 화제가 됐다. 매력적인 보컬리스트 아일, 다재다능함을 한껏 선전한 벤지, 독창적인 음악을 하는 안성진 등 여러 뮤지션이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팬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아이돌 일색인 음악 경연 시장에서 <슈퍼밴드>는 색다른 대안이 됐다.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아졌지만 트로트는 여전히 어른들이 즐기는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TV조선의 <미스트롯>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10대, 20대도 트로트를 전보다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 빼어난 가창력과 섬세한 표현력을 두루 갖춘 송가인은 <미스트롯> 덕에 트로트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내년 1월부터는 남자 버전인 <미스터트롯>이 방송될 예정이다. 트로트의 활성화에 이들 <트롯> 시리즈가 한몫하고 있다.


혼탁한 음원차트에서 빛을 발한 진짜 강자들

의심스러운 날들이 연초부터 이어졌다. 인지도가 현저히 낮은 가수들이 어느 순간 음원차트 상위권을 꿰찼다. 입소문이 난 덕이라지만 열렬한 반응은 좀처럼 체감되지 않았다. 차트에서의 상승 추이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일련의 정황은 음원 사재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명의 가수들이 갑자기 인기를 끄는 현상이 거듭된 탓에 에픽하이, 장범준, 아이유의 음원차트 1위 등극은 더 빛났다. 많은 지지자를 보유했기에 정상에 오르기가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이 좋았기 때문이다. 에픽 하이의 '술이 달다', 장범준의 '당신과는 천천히', 아이유의 'Love Poem' 등은 탄탄함과 안정감을 겸비해 근사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1위는 음악팬들이 온전히 작품성에 화답한 사례다.


시작은 웃겼지만 지금은 시대의 목소리

누가 봐도 그 래퍼가 확실한데 뒤집어 쓴 복면을 믿고 아니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것부터 웃겼다. 자신의 실패를 노래 소재로 활용하고, 비애를 복수심으로 치환하는 행동도 우스꽝스러웠다. 지난해 Mnet <쇼미더머니> 일곱 번째 시즌을 통해 등장한 마미손은 독보적인 코미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가벼워 보이는 그가 최근에 낸 노래는 결코 우습지 않다. '별의 노래'는 각박한 현실에 힘들어하지만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사는 요즘 세태를 꼬집는다. 노래 중간과 끝에 외치는 "괜찮아, 울어."는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시원한 위로이자 격려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는 올해 초미의 관심사였던 음원 사재기를 재치 있게 비판했다. 마미손은 이제 사회상을 얘기하는 인물이 됐다.


더욱 활발해지는 아이돌 가수들의 외국 시장 진출

올해 케이팝은 나라 바깥에서 힘차게 날아올랐다. 방탄소년단은 6월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이틀간 열린 콘서트에 12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월드 스타의 높은 인기를 과시했다. 또한 여섯 번째 미니 앨범 [Map of the Soul: Persona]가 [Love Yourself 轉 'Tear']와 [Love Yourself 結 'Answer']에 이어 세 번째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해 케이팝의 새 역사를 썼다.


SM 엔터테인먼트가 미국 시장 진출의 야심을 품고 조직한 슈퍼엠도 데뷔 EP [SuperM]이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경사를 맞았다. 이와 함께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가 앨범 차트 24위, (여자)아이들의 [I Made]가 월드 앨범 차트 5위에 드는 등 걸 그룹들도 빌보드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이다.


지난 11월 빌보드는 '2010년대 최고의 케이팝 100곡' 리스트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샤이니의 '셜록', 우주소녀의 '비밀이야', AOA의 '짧은 치마', 세븐틴의 '아주 NICE', 트와이스의 'TT' 등 국내 음악팬들이 사랑한 노래들이 대거 들어 있다. 이런 기사가 작성됐다는 것은 서구 음악팬들의 우리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커지고 있으며, 그만큼 케이팝의 위상도 강해지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 준다. 내년에도 케이팝의 약진은 계속될 것이다.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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