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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Jan 07. 2020

과거의 1월 음악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특별하고 화끈했던 순간들

세월은 보이지 않는 큰 손으로 우리를 새해의 궤도에 올려놓는다. 가는 해를 바라보며 싱숭생숭했던 것도 잠시, 이제는 시간이 맞춘 일상에 다시금 몸을 태운다. 새로우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들이 시작된다. 이렇게 또 세월의 이동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음악계도 평상시처럼 활동을 이어 간다. 그동안 음악인들이 알게 모르게 손질해 온 노래들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연초에는 작품이 출시되는 속도가 급한 편은 아니며 출하량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연초는 워밍업 시즌이라 할 만하다.


2017년 1호 <다중음격>은 음악계의 예열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면서 지난날을 훑어본다. 과거 1월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피며 음악계의 트렌드와 사건을 회고한다. 일일이 전망하기에는 역사가 너무나도 방대한 탓에 5년 단위를 기준으로 했다.


1997년 Daft Punk의 [Homework] 출시

지금은 웬만한 음악팬이라면 다 아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일렉트로닉 듀오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데뷔 앨범이 1997년 1월에 출시됐다. 이들은 앨범 발매 1년 전부터 리드 싱글 'Da Funk'로 전자음악 애호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이 곡은 단순하고도 명료한 신시사이저 루프, 피-펑크(P-funk) 스타일의 육중한 드럼, 사이사이 짤막하게 들어간 브레이크비트를 내세워 청취자를 유혹했다. 가사는 없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마법 같은 곡이었다.


앨범을 공개한 뒤 다프트 펑크는 두 번째 싱글 'Around the World'로 연이어 안타를 날렸다. 이 곡 역시 'Da Funk'와 큰 차이 없이 동일 루프의 나열에 가사는 단 한 줄만 거듭될 뿐이었지만 디스코에서 착안한 가벼운 리듬, 간헐적인 패턴 변화를 통해 흡인력을 자아냈다. 'Da Funk'와 'Around the World' 모두 영국 싱글 차트 상위권에 들고 빌보드 댄스 클럽 차트 정상에 올라 그룹의 인지도는 단숨에 상승했다.


보컬이라고는 어딘가에서 추출한 목소리, 짧은 문장의 반복이 전부였으나 사운드의 밀도 높은 집적과 유려한 연출이 보컬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밋밋함을 누그러뜨렸다. 다프트 펑크의 성공적인 데뷔는 프랑스 전자음악 신의 부흥에도 힘이 됐다.


1992년 얼터너티브 록의 전성기를 연 Nirvana

너바나(Nirvana)의 2집 [Nevermind]가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앨범은 1991년 9월에 출시됐지만 역사적인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이 1991년 12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것에 힘입어 앨범도 주류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 [Nevermind]가 히트함으로써 완전히 묻혔던 1989년의 데뷔 앨범 [Bleach]도 재조명받았다.


너바나를 향한 갑작스러운 인기는 음악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Smells Like Teen Spirit'과 [Nevermind]가 확 뜨면서 시애틀의 음악 신이 눈길을 끌었으며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가 수면에 떠올랐다. 이로써 1990년대 초반의 대세 장르는 크게 힙합과 그런지로 양분되기에 이른다.


힙합은 경제적 궁핍과 불만족스러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발이 주된 태도였고 그런지는 소외와 좌절이 중심 제재였다. 따라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고 억압적인 관습을 바꾸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자아에 대해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청년들을 위한 노랫말이 주류 음악계를 장식했다. 힙합과 그런지의 도약이 이룬 풍경이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Aretha Franklin

어리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 여성 뮤지션으로서는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대중음악에 공헌한 인물을 기리는 목적에서 1983년 설립된 이 조직은 1986년부터 아티스트 헌액 행사를 시작했다. 이 체제를 도입한 원년에는 척 베리(Chuck Berry),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샘 쿡(Sam Cooke)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어리사 프랭클린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빌 헤일리(Bill Haley) 같은 엄청난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87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어리사 프랭클린은 박력과 유연한 표현력을 겸비한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소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967년에 발표한 'Respect'의 원래 주인은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이지만 그녀의 폭발적인 보컬 덕에 공민권운동의 찬가로 등극하며 더 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어리사 프랭클린은 억압적 체제에 반기를 드는 로큰롤의 정신과 짝을 이룬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들이 비욘세(Beyonce)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 앨리샤 키스(Alicia Keys)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성 가수 지망생들이 닮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들이다. 그런데 이 스타들이 본보기로 삼는 인물이 어리사 프랭클린이다. 절창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어리사 프랭클린은 여성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해 후배 뮤지션들에게 귀감이 됐다.


2007년 재즈 앨범을 선보인 신해철

솔로와 프로젝트 그룹, 넥스트 재결합 등을 오가던 신해철은 2007년 1월 또 한 번 색다름을 내보였다. [The Songs for the One]을 통해 재즈 뮤지션으로 완전히 분한 것이다. 물론 1991년 2집의 '재즈 카페', 1997년 토이의 앨범 [Present] 중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재즈를 들려준 적이 있지만 자신의 앨범 전체를 재즈로 채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턱시도를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음반 커버 사진만큼 그의 변신도 낯설었다.


호불호는 좀 갈렸다. 충성심 강한 지지자들은 당연히 성원했지만 어떤 이는 곡에 녹아들지 못하고 느끼하게만 느껴지는 보컬, 세월에 순응하는 듯한 레퍼토리를 꼬집으면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부정적인 의견이 나온 것은 그의 음악이 항상 지녀 왔던 비판 정신, 생기에 청량감을 느낀 음악팬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하다.


보컬이 아쉽긴 해도 [The Songs for the One]은 안일하고 식상한 리메이크 앨범은 결코 아니었다. 샘플러와 소프트웨어로 음악을 뚝딱 만드는 시대에 신해철은 수십 명의 연주자를 대동해 음악은 사람들의 온기가 밴 예술임을 역설했다. 또한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장르를 탐구함으로써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지금 돌이켜봐도 멋진 시도였다.


1992년 R. Kelly 뉴 잭 스윙의 끝물을 장식하다

알 켈리(R. Kelly)는 그가 이끄는 R&B, 힙합 그룹 퍼블릭 어나운스먼트(Public Announcement)와 함께 사실상의 데뷔 앨범 [Born into the 90's]를 발표한다. 앨범의 리드 싱글 'She's Got That Vibe'는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인기를 끌면서 R&B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지금도 외국 라디오에서 종종 나올 만큼 당시 음악팬들의 호응은 제법 뜨거웠다. 후속곡 'Honey Love', 'Slow Dance (Hey Mr. DJ)'도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알 켈리는 이후 그룹과 관계를 끊고 솔로로 나선다.


이 앨범과 알 켈리의 행보는 당시 흑인음악계의 변화를 말해 준다. 1980년대 후반에 생겨난 뉴 잭 스윙은 이 시기에 정점을 찍고 빠르게 쇠퇴한다. 동시에 힙합 소울이 대세로 부상했다. 시장의 분위기를 간파한 알 켈리는 뉴 잭 스윙을 버리고 솔로 앨범부터는 힙합 소울로 갈아탄다. 게다가 혼자 활동해야 그의 핵심 아이템인 섹스어필이 본인을 더욱 빛나게 할 테니 솔로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음악도 결국 경영임을 깨닫는다.


2007년 한국 하우스의 성장세를 기록한 로맨틱 카우치

최근 일렉트로니카가 많은 사랑을 받는 상태지만 약 10년 전에도 나름대로 소박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허밍 어반 스테레오, 캐스커, 클래지콰이 같은 밴드들이 인디 음악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전자음악이 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하우스 룰즈(House Rulez), 아워멜츠(Hourmelts), 오리엔탈 펑크 스튜(Oriental Funk Stew) 등이 가세하면서 전자음악이 인디 신의 '핫'한 장르가 됐다.


프로듀서 전자맨과 보컬리스트 제이드의 혼성 듀오 로맨틱 카우치(Romantic Couch)도 2007년 1월 데뷔 앨범을 발표해 일렉트로닉 신을 더 후끈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하우스를 주메뉴로 삼아 경쾌한 리듬을 선보이는 가운데 여성 보컬을 통해 부드러움과 농염함도 표현한다. 여러 느낌을 단단히 엮은 로맨틱 카우치의 음악은 무척 매력적으로 들린다.


앨범 제목 [The House]는 그룹의 지향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우연히도 당시 하우스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집중적으로 나온 탓에 국내 일렉트로닉 신에 대한 서술이 되기도 한다. 2011년 2집을 낸 뒤 자취를 감췄지만 데뷔작의 타이틀은 그 순간을 포착한 증표로 남게 됐다.


1982년 관객에게 충격을 준 생식 오수봉 선생님

많은 이를 경악케 한 사건이다. 1982년 1월 20일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은 공연을 하던 중에 살아 있는 박쥐의 머리를 깨물어 먹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진정 엽기적인 행각이었다.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은 2004년 공개한 '록 음악의 가장 거친 신화'(Rock's Wildest Myths) 리스트에서 오지 오스본의 이 행동을 2위로 꼽기도 했다.


이날 관객 하나가 무대를 향해 박쥐를 던졌는데 오지 오스본이 이를 모형인 줄 알고 씹은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나중에 실제 박쥐임을 안 뒤 본인도 엄청 놀랐다는 설이다. 하지만 관객을 향해 짐승의 피를 뿌리는 등 기이한 행위를 이미 여러 차례 저질러 왔기에 계획된 공연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어쨌든 오지 오스본은 공연을 마치고 병원에 가서 광견병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혹시 이상한 병에 걸릴까 봐 예방하는 차원에서 맞은 걸까? 아니면 미친 행동을 계속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까? 진짜 이유는 전자가 되겠지만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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