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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May 20. 2020

반짝 하고 사라진 추억의 어린 가수들

대중음악계의 물살은 언제나 빠르다. 트렌드는 급하게 바뀌며 하루에도 수십 팀의 가수가 쏟아져 나온다. 때문에 대중의 눈길을 잡지 못하고 시장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부지기수다. 이처럼 순식간에 입장과 퇴장을 거의 동시적으로 행한 이들은 특히 아이돌, 댄스음악 분야에 많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가 키운 김선아, 제2의 신화로 통한 배틀, 멤버 인원 신기록을 수립한 i-13, 여린 음성과는 다르게 표현은 스트레이트했던 하드코어 발라드 가수 이가희 등이 우선 생각난다. 한때는 기대주라 일컬어지던, 그래도 나름대로 유명한 노래 하나쯤은 남긴 그때의 소년소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김선아 | 이주노의 마지막 가수

꽤 괜찮은 앨범이었다. 김선아의 1집은 정연준, 윤종신, 김준선, 외국 작곡가들의 참여로 팝, 컨템퍼러리 R&B, 가요 특유의 감성을 두루 아울렀다. 타이틀곡 'Give It Up'은 외국인 댄서들을 고용해 남다른 그루브를 나타냈다. 하지만 타이틀곡이 속칭 '버터 향'이 강했던 탓에 많은 인기를 얻는 데에는 실했다. 그렇게 김선아는 히트 없이 활동을 접었다. 이후 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진학해 음악 공부를 계속하던 김선아는 방향을 조금 틀어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그 시절 김선아가 주목받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애처로운 이는 김선아를 제작한 이주노였다. 영턱스클럽과 허니 패밀리의 앨범 실패에 이어 김선아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그는 프로듀서 직함을 내려놓게 됐다. 김선아는 원래 솔로가 아닌 걸 그룹으로 나올 계획이었는데 데뷔가 지연되자 다른 멤버들이 회사를 나가며 그룹 활동은 무산됐다. 걸 그룹 제작이 무난하게 이뤄졌다면 과연 성공했을지.


배틀 | 거듭되는 배틀에서 패전함

2005년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레츠 코크플레이 배틀신화>를 통해 데뷔한 그룹. 프로그램에 신화가 참여한 이유로 이들에게는 '제2의 신화'라는 타이틀이 붙기도 했다. 승리, 가인, 전효성 등 현재 톱 가수로 활동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종 선발된 여섯 멤버는 프로그램 종방 뒤 약 1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6년 겨울 정식 데뷔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지금처럼 흔치 않았던 때에 많은 이의 관심을 받으며 가수로 나섰지만 딱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세 장의 미니 앨범을 내고 소식이 없는 배틀은 어렵게 오디션의 격전장에서 살아남았으나 프로 무대에서의 생존은 더 쉽지 않음을 실감해야 했다.


이가희 | 정석원이 밀던 그 아이

데뷔 당시 17세 나이, 015B의 정석원이 제작했다는 배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여고생 가수 이가희도 한 장의 앨범을 내고 쏙 들어갔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검증한 정석원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담당한 덕에 1집 [Lee Ga Hee]의 면면은 상당히 준수하다. '밀'은 동양적인 선율로 묘한 분위기를 내면서 웅장한 관악기와 코러스를 덧입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떠나지마요'는 발라드에 일렉트로니카를 혼합한 이채로움을, '1년 만의 전화'는 1980년대 스타일의 하우스로 예스러움을 전달한다.


정석원도 이가희를 아무 이유 없이 전폭 지원하지는 않았을 터, 그녀는 이소은을 연상시키는 미성과 차분하지만 답답하지 않은 가창을 매력으로 청취자를 매료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만큼 강렬하지는 못했던 나머지 히트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수록곡들이 욕설과 비속어 사용, 수위 높은 표현으로 줄줄이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만은 여고생의, 발라드를 주된 스타일로 하는 앨범이 달성한 성과 아닌 성과였다.


엠알제이 | 'Feels So Good' 덕을 봤죠

래퍼 겸 싱어 엠알제이(MRJ)는 2001년 1집 [Style]로 데뷔했지만 일말의 주목도 받지 못해 등장과 동시에 퇴장하는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는 첫 판의 쓰라린 경험을 극복하고 이듬해 두 번째 앨범 [The 4th Dimension]을 발표했다. 수록곡 중 재즈 뮤지션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의 대표곡 'Feels So Good'을 차용한 '행복하니?'가 음악팬들 사이에서 소문을 타며 존재를 알리게 됐다.


사실 2집은 1집의 재정비 버전이었다. 척 맨지오니 곡 제목을 그대로 쓴 '행복하니?'의 오리지널 버전을 비롯해 'So Nice', 'Mad Dog' 등이 똑같이 실려 있다. 한 번 더 해보겠다는 근성과 인터넷을 통한 소문 확산 덕에 기사회생한 셈.


2005년 2집으로 표기한 세 번째 앨범을 냈지만 친숙한 샘플링이 없었던 탓인지 예전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연애시대>, <달자의 봄> 등 드라마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며 간간이 소식을 전했으나 어느 새인가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모닝 | 아침은 그렇게 훌쩍 지나갔네

모닝은 깜찍한 댄스음악이 아닌 순수함으로 다른 걸 그룹들과 차별화했다. 현악기가 들어간 발라드를 메인으로 했고 때로는 록의 인자를 추가하기도 했다. 이런 스타일이 본인들만의 개성이긴 했지만 아주 독특하거나 흥미롭지는 못해 인기 획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멤버들이 괄목할 만큼 훌륭한 가창력을 보유하지 못한 점도 실패의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때문에 걸 그룹은 댄스곡을 해야 한다는 업계의 인식을 강고하게 한 사례로 남았다.


모닝은 희극인이라고 부르는 게 영 내키지 않는, 안 웃긴 개그우먼 백보람의 가수 경력이라는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명을 다했다. 닭살 돋게 하는 청순함, 심히 청초한 소녀티를 만끽하고 싶은 이에게 '사랑하는 건 나쁜 게 아니죠'를 추천한다. 특히 3분 48초 이후.


i-13 | 신기록을 달성하고 사라진 아이들

남성 11인조 그룹 논스톱(Non-Stop)이 세운 멤버 수의 기록은 소방차의 정원관이 제작한 걸 그룹 아이써틴(i-13)에 의해 깨졌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연령 폭이 다양한 이들의 예명은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12간지에서 따왔다. 이 중 뜬금없는 '모(김보련)'는 '묘(김보림)'와 쌍둥이라서 새로 생겨났다. (이게 정말 모 하는 짓인지…)


멤버가 많다 보니 이들의 기사에는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내용이 꼬박꼬박 나왔다. 1억 5천만 원짜리 대형 버스를 활동에 맞게 개조하느라 또 큰돈이 들었고, 도시락을 먹는데도 식대만 하루 수십만 원이 깨지며, 의상도 수백만 원이 든다는 이야기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신기록을 수립한 대규모 체제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이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생 멤버들 때문에 어설픈 감이 컸고, 이는 프로 세계에서는 명백한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귀엽게 봐 주는 것은 한 번으로 끝, 애석하게도 이들에게 들인 큰돈은 환수하지 못했다. 그래도 후렴과 전자음 루프가 선명하고 캐치한 'One More Time'은 제법 괜찮았다.


하늘 | 발랄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운

네덜란드 록 밴드 쇼킹 블루(Shocking Blue)의 히트곡 'Venus'를 번안한 '웃기네'로 친근하게 다가온 하늘.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한 그녀는 귀여운 외모와 따라 하기 쉬운 율동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방송에서는 여러 겹 옷을 입어 의상을 바꿔 감으로써 색다른 무대를 선보였다.


데뷔 앨범 [Voice of Purity]에는 또래 이성과의 연애('첫사랑'),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학생의 질투('Teacher'), 친한 오빠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오빠, 사랑해') 등 나이에 맞는 풋풋한 감정을 주되게 표했다. 시원한 가창력을 보유했음에도 후속곡 'Come On'이 데뷔곡만큼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면서 그녀의 활동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긴 공백 뒤 2010년 로티플스카이로 개명한 하늘은 'No Way', 드라마 <마이더스>의 OST '거짓말이죠' 등을 발표하며 가수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성인 가수로서 새롭게 변신했지만 2013년 뇌종양 투병 중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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