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때문에 들통난 나의 편견에 관하여
긴 투병 생활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4년 6개월의 시간을 버텨 왔지만
결국 의료진도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치료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늘어만 가는 빚더미도 부담이지만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다리를 고치겠다고
고집을 피웠나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절단했으면 집을 건지고 빚도 없었지 않았을까?
장애인 판정을 빨리 받아서 차라리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왜 가족들을 힘들게 만들었을까?
뒤늦은 후회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어야만 했다.
13번의 수술, 기가 막히다.
아마 최단기간 연속 수술과 최대 기간 재활을 동시에 기록한 혈관 질환 환자일 것이다.
보통 혈관 질환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서 이렇게 많은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내가 병실에 입원하는 동안 나이가 많은 환자들도 수술 한 번으로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서
잘 지낸다고 하는데, 건강한 줄만 알았던 나는 병원에서 사계절을 몇 번을 겪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초긍정적인 회로를 돌리는 성격이라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장애인 신청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을 했다.
그동안 수차례 신청을 보류하고 있었던 그 일.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내가 장애인이 되는구나
생각하니 뭔가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그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경증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이 된 후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물론 복지 서비스가 어느 정도 있지만 경증 장애인들에게 체감할 정도로 서비스되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한다.
매년 정부에서 장애인 복지에 많은 돈을 쓴다고 하는데 어디에 쓰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사실 의료비 지원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꽤나 까다롭다.
주로 일상 활동 자체를 혼자서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그래서 경증 장애인은 그 나름대로 더 힘든 점이 있다.
비장애인과 중증장애인(비장애인의 경우 장애인이라고 인식하는 범위)의 어중간한 위치
이것이 가장 문제인 것은 바로 취업에 있다.
즉, 생존을 위한 활동에 있어서 장애가 있어서 제약이 있지만 지원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21년 기준) 경증 장애인은 약 170만 명에 이른다.
2021년 한 해에만 경증 장애인만 5만 명 정도 등록했다고 하니 그중에 후천적으로
80% 가까이 장애인이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 혹은 사고로
장애인 되는 것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단, 재취업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지원을 해봤지만 두 가지 큰 걸림돌이 있었다.
1. 중년이 되어 버린 나이
2. 장애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에서 중년으로 재취업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인재들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요즘 청년들도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 중장년들의 재취업 선택은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신체능력으로 할 수 있는 직업군까지 제약적이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애인일자리라는 것은 많은 지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제한적이어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장애정도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지적. 발달 장애인과 지체 장애도 경증과 중증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정해진다
물론 자신만의 특장점을 살리거나 교육을 통해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기도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그게 현실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재활 중인 나에게 맞는 것은 바로 배달아르바이트였다.
그나마 재활에 성공하여 도보가 일정 부분 가능해지면서 할 수 있게 된 일이었다.
처음 콜을 받고 수행했는데 5년 만에 일해서 받은 3,500원의 감동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다른 취업의 기회를 찾으면서도 배달일을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배달 알바를 시작하는데 한 달이 넘게 고민을 하였는데 혹시라도 아는 지인들을 만나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직업의 상실과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아서 그랬는지 변명이지만 결국 한 달 내내 고민만 하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런 조건들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결국은 그렇게 스스로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첫 콜을 수행하고 5년 만에 처음 소득 한 3,500원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기분은 세상을 향해 첫걸음마를 하는 기쁜 마음이었다.
어쩌면 천로역정의 기분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도보 배달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보통 사람들에게는 짧은 거리를 먼 여행길처럼 다니고 있었는데 자주 오고 가는 사거리에 자전거 가게에 전시된 자전거들을 나도 모르게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전거로 배달하면 조금은 편할 것 같은데..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었고 자전거를 사용할 자신이 없었다.
내 다리가 아직 그런 움직임을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다음 배달을 위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200여 미터를 이동했을까
갑자기 뒤에서 저기요~ 잠깐 기다려봐요 하는 외침에 돌아보니 어르신 한 분이 자전거를 타면서 다가오면서 날 향해 외치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지? 이런 의문으로 어르신을 만났는데 대뜸 자전거 탈 줄 알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네, 탈 수 있죠. 대답을 하면서 혹시 어르신이 자전거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시려는 걸까? 그런 생각들과 여러 가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예의 있게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어르신은 망설임 없이 말씀을 이어가셨는데 다리가 불편해 보여서 자전거 선물하려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순간 이게 무슨 말이지라면서 혼란스러웠다.
아니 나 요 앞에 삼천리자전거 가게 사장인데 며칠 지켜봤는데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배달하는 것 같아서 배려해 주시며 말씀해 주셨는데 중 고니깐 부담 갖지 말고 타라고 하시면서 한 손에 자물쇠도 쥐어 주면서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날 뒤로 하시고 웃으면서
돌아가셨다. 한참 후에야 돌아가는 어르신을 향한 감사 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계산적인 생각으로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부끄러움과 감사함..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혼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 날 지켜보고 이렇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있구나
3개월 정도 지나서 과일 상자를 들고 자전거 가게에 방문을 하고 사장님과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살아있으니깐 무엇이라도 해야지..
잃어버린 것만 보지 말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작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기부.
장애인의 삶 시작점에 발판이 되어준 그 감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자전거는 새로운 시작에 마중물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자전거라는 세상의 징검다리를 통해서 끝이 났다고 생각했던 나의 세계는 그 지경을 다시 넓히고 있다.
누구나 실패하고 좌절할 순간이 올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내 경우만 해도 지금도 초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도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날 멈추지 않고 달려가게 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