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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진희 Oct 23. 2024

13화. 칼이 무서운 사람

네댓 살 무렵에 교회에서 목사님 딸과 귀신놀이를 했다. 그 아이는 내게, 눈을 감고 귀신처럼 자기를 잡으라고 시키고, 어딘가로 도망쳤다. 나는 그 말대로 눈을 꾹 감고 양팔을 허공에 더듬으며 아이의 소리를 좇았다. 몇 발자국을 뗐을까. 유리로 된 여닫이 양문에 부딪쳤다.

눈을 떠보니 내 키만 한 유리에 크게 금이 갔고, 유리는 쩍하며 깨졌다. 내 왼팔 손목 안쪽에서 따뜻한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어른들이 달려왔고, 그 아이의 엄마가 천 기저귀로 왼팔을 황급히 휘휘 감았다. 하얀 기저귀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택시가 엄마와 나를 태우고 읍내로 달렸다. 나는 침대에 누웠고, 의사는 벌어진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악을 쓰고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 여기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우는 데가 아니야.”

의사의 엄하게 나무라는 말에 놀라 울음을 뚝 그쳤다. 억울하고 서러운 감정과 공포까지, 모두 꾹 눌렸다. 다행히 동맥을 비켜갔다고, 만약에 동맥을 다쳤다면 큰일이었다고 의사는 엄마에게 말했다. 어린 손목의 흉터는 나와 함께 커갔고, 지금은 내 손바닥 길이 만하다.


나는 날카로운 어떤 도구로 인해 피가 나는 일에 진저리를 친다. 검투 영화는 아예 안 본다. 무심코 보던 영화에서 갑자기 칼이 흉기가 되면 재빨리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온몸이 저릿하다. 제왕절개 후, 살이 거의 다 아물 때까지 수술 자국도 못 보았다. 그런 나에게 아기 손가락을 메스로 가르고, 신체 다른 부위의 피부를 떼어 손가락에 이식하는 수술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지고, 골이 흔들리는 스트레스였다.

처음 안아 본 아기는 너무나 순결해서 고귀하기까지 했다. 티 없이 깨끗하고 여린 피부는 경이롭기도 했다. 남자아이는 크면서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진다는 말에도, 될 수 있으면 이대로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 진료 상담 답변에서 합지 손가락의 분리 수술은 돌 무렵이 적당하다고 했다. 우리 아기는 길이가 다른 두 손가락이 붙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긴 손가락은 휘어 있었다. 수술이 아무리 싫어도, 더 휘어지기 전에 꼭 분리해줘야 할 일이었다. 엄마는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했다.


우리나라 수부외과 분야에서 저명한 의사를 수소문했다. 반년여를 대기한 끝에 두 곳에서 진료 상담을 받았다. 진료를 보고 나면 뿌연 상황이 또렷해질 줄 알았는데 의사마다 관점과 수술 방법이 달라서 선택을 놓고 고민은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합지증과 다지증 수술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를 발견했다. 수술 후기 코너의 글부터 허겁지겁 정독했다. 그러나 얼마 못 읽고, 어느 엄마의 글에 마음이 요동치고 말았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했다.

      

  "내 딸은 육손이었다. 양가 부모님, 친구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술받기 전까지 외출은 꼭 필요할 때만 했고, 그럴 때도 한 번도 손을 밖에 내보인 적이 없다. 돌 전에 수술을 받았고 손가락이 다섯 개가 되었다. 연기한 돌잔치에서 아기 손을 편히 꺼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가족사진도 예쁘게 찍을 것이다. 그동안 아기 손 때문에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다 잊고 살 것이다. 우리 가족 고생 많았다."

           


아예 없었던 일처럼 다 잊고 살겠다니, 아이 손이 다르다는 게 그렇게 끔찍했나. 밖에 내놓으면 안 될 흉물이라는 건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당신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어쩌면 이토록 해맑은 결말인가. 깊은 한숨 속에 손맥이 풀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혼자 서운했다. 화까지 났던 건 이미 스스로 가책하고 있는 지점이 찔린 데서 온 역동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나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엄마는 나보다 솔직한 글을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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