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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Jan 21. 2021

마주하는 고민-3. 차라리 깽값(?)을 물자.

육아차차 육아 육아 #23

아이를 키우 절대 경험하기 싫은 상황을 꼽자면 단연 모든 종류의 사고다. 크고 무서운 범죄나 사고는, 행여 부모의 앞서감이 씨가 될까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터라 당장 가장 큰 걱정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일어날 법한 불가피한 부딪힘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건 아이들을 맡은 선생님들의 학대라든가, 같은 반 아이의 괴롭힘 정도가 되겠지.

감사하게도 이제껏 문제가 될 만한 교사를 만난 적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한다는 아쉬움이 더 많았다. 돌이키면 그저 고맙고 송구스럽다.

그런데 아이들 간에 충돌 있다. 첫째는, 직접 가해진 위해는 아니었지만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일이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반에서 여러모로 유명한 남자 개구쟁이가 딸아이 친구 옷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참으로 다양하게 볼펜부터 사인펜까지 지닌 학용품을 골고루도 사용했단다. 아내와 왕래가 잦은 그 댁 어머님께서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하소연한 덕에 우리는 간접 경험만으로도 타는듯한 속 쓰림을 느꼈다. 가해자는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며, 담임을 통한 이런 연락적잖이 불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일이 처음 아니라 연락을 시도한 담임선생님의 스트레스 또한 말할 수 없었다. 냥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갔다. 새 옷은커녕 세탁비도 받지 못했다.

둘째의 경우엔 좀 더 직접적이고 심각했다. 언젠가 유치원에서 긁혀온 것이다. 그날 퇴근 전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어오는 길에 상처 연고 좀.”

“왜? 누가 다쳤어?”

“아들. 볼이 좀 긁혀서 왔네.”

담담한 말투에 나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하지만 집에 가서 상처를 보니 꽤 크고 깊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구랑 장난감 서로 갖고 놀겠다고 하다가 꼬집대.”

전화 목소리와는 달리 아내 또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역시나, 상대는 이래저래 원에서는 좀 유명한 아이였다. 아빠 과하게 흥분해서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너도 때렸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 이거였다. 당장 애 볼이 움푹 파인 걸 보니 눈이 뒤집어졌다.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라든가 사과나 용서를 확인하는 따위의 옳고 바른 소리가 입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러기엔 난 도덕적인 인간은 절대 아니었고 당장  앞에 다친 내 새끼가 제일 귀한 한낯 못난 아비에 불과했다.

피를 봐서인지,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은 건지 유치원에서 피부과 진료 강권했다. 싼 비보험 치료는 영수증 처리로 원에서 모두 부담했고, 다행히 아이 볼 이내 깨끗해졌다. 다 아문 걸 갖고 나도 뭘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후에 학예회에서 그 부모가 앉은 쪽을 최대치로 싸늘하게 쳐다보는 걸로 아이의 복수를 마감할 수밖에.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첫째가 생기기도 전부터 시작한 고민이었다. 아이가 다치고 오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어떤 형태든 피해를 입으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매번 같은 결론을 내렸다. 너무 속상할 것 같으니 당하지만은 않도록 교육하자고, 그리고 최소한 당한 만큼은 돌려주라고 가르치기로 했다. 차라리 가해자가 되는 게 낫지 피해자는 싫다고 반 농담 삼아 하기도 했다. 그렇듯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한 이기심의 얼굴어나는 순간이었다.

러나 모든 게 의미 없었다. 숱한 가정과 시뮬레이션을 행해도 막상 닥치니 그렇게까지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만약에 당하면 가서 당장 똑같이 걔 옷을 엉망으로 하라고, 얼굴에 한껏 피를 내고 오라고 독려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입만 살았을 뿐 모질지도 못했고, 아무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애더러 그렇게 하라교육 잘못됐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만한 진실이다. 하지만 원체 세상이 뒤죽박죽이니 쌓이기만 하는 게 걱정이요, 고민이다. 특히나 즘은 목소리 크고 남들 배려 안 하는 인간들이 제 잇속 다 챙기고 잘 사는 거 같아서 너무 속상하다. 당장에 우리 아이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건 해도 가해자들의 태도는 어딘가 기시감이 가득하다. 이렇듯 인터넷에서 마녀 사냥을 당하는 ‘또라이’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 산재해 있거늘, 그저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강조할 수 있을까?


머리 싸매고 고민해봐도, 도저히 먼저 폐 끼치고 다니는 걸로 방어하라고는 못하겠다. 부모가 글러먹기를 쪼다라서 아이들도 쪼다로 키우고 있으니, 그냥 최대한 조심해서 잘 피해 다니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 다만 그러는데도 해를 입힌다면 최선을 다해서 대응해 줄 생각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인생들과 구태여 엮일 필요가 있을까. 만고 불변의 진리가 있지 않은가. 똥은 결코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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