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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Jan 29. 2021

유전의 신비-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또 다른 나

육아차차 육아 육아 #24

    딸아이가 학원 차를 타지 못하는 상황에선 내가 직접 데려다주곤 한다. 학원 앞이 마침 큰길이라 도착해도 바로 내려주진 않는다. 비록 조수석이 인도 쪽이어도 주변도 한 번 더 살펴보고 안전하단 게 확인되면 그제야 차 문을 열어 들여보낸다. 그런데 녀석은 아이들을 실어오는 큰 학원 버스가 눈앞에 보일 때면 유독 인사도 잊은 채 급히 달려서 들어갔다.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싶어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다. 


    “학원 차에서 내린 친구들이랑 겹치면 체온 재는 줄 오래 서야만 돼. 서서 기다리는 거 싫어.”


    일일이 체온을 재야 학원 입장이 가능했던 시기의 날카로운 기억이다. 그거 잠깐 줄 서서 기다리는 게 수업 전부터 헐레벌떡 뛰는 걸 감내할 정도로 싫었던 걸까? 자문해보면 이해는 된다. 멍하니 기다리고 의미 없이 시간 보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내 얘기다.


    다혈질의 급한 성격뿐만이 아니다. 쓸데없는 고집, 과하지는 않지만 선명한 강박증. 고백하기 부끄럽게도, 모두 감추고 싶은 내 모습이다. 사회화를 거치며 깨닫고선 숨기려 애쓰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살아 숨 쉬는 못난 내 성정들이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두 아이에게 조금씩 도드라지는 성격들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 녀석에게 몰아서 간 건 아니다. 그랬다면 큰일이었겠지. 그렇지만 번갈아 삐죽거리고 튀어나오는 모난 것들을 볼 때마다 사람이 겸손해진다. 마치 나 혼자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담은 몰래카메라를 강제로 보는 기분이다. 누가 봐도 내 허물인데 그게 새로 태어난 두 생명체에 고루 분배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당사자가 원치도 않은 유산을 물려준 터라 민망하기 짝이 없다.


    한 번씩 한참 고집을 피우며 자기 뜻대로 하기를 주장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굉장히 익숙하다. 떼를 쓰는 목소리의 울림과 몸짓, 분노의 강도까지도 왠지 낯설지 않다. 전에 얘들이 또 이랬었나 싶어 생각해보면, 신발을 가지런히 놓겠다고 기를 쓰거나, 동그라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종이가 찢어지도록 지워대는 것들 모두가 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다. 익숙함의 근거는 아이들의 지난 행동이 아닌, 기억 속의 내 유년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로 부모님께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저런 걸 어떻게 키우신 거지.

    하필 전부 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내 성격들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스스로 보기에도 나의 이런 부분은 별로야 싶은. 겨우 억누르고 고치면서 드러내지 않았는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튀어나오니 방법이 없다. 이런 이유로 혼내 봤자 애먼 애들만 잡는 꼴이 된다. 스스로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른 채 혼이 나는 아이들과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뻔히 아는 유전적 전파자의 대립이니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심하게 꾸짖지도 못한다. 뭐 때문인지 정확히 알기도 하거니와 어딘가 거울을 보며 의미 없는 욕지거리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그렇다.


    간혹 나는 낯설기만 한 독특한 행동에 아내가 잠시 멍해지는 걸 겪으면 설마 해 본다. 언젠가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런 것들은 바로 소싯적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 뾰족 거리는 모습들이 내가 아는 아내를 생각하면 전혀 의외라 놀라기도 했다. 생각보다 거칠고 과격하게 살았더라고. 여태껏 속고 산 건가 하는 생각도 약간 들었다.      

    사람이 부정적이라 거슬리는 단점들만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분명 좋은 점도 복제된 게 많다. 아내의 무던하고 활달한 성격은 고루 잘 전달이 됐다. 아이들은 어디서든 이쁨받으니까. 아내의 영특함도, 충분히 잘 유전된 것 같다. 다만 이 경우는, 지난 글 언젠가 말한 대로 굳이 따지자면 Ctrl+C가 아닌 Ctrl+X라 온전히 반갑지만은 않다.

     

    아이를 기르면서 생각지도 않은 복제 인간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내 장점이든 단점이든, 부정할 수 없는 나를 꼭 닮은 존재들과 말이다. 신기하고 웃기지만 불편하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렇게나 고치고 싶은 것들이 아이들에게 나타나니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참 재미난 일이다. 삶은 죽을 때까지 반성하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지. 날마다 무방비로 튀어나오는 나의 미니미를 보며 오늘도 겸허해지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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