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여자가 노트 하나를 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일 같은 것을 모두 적으라고 했다.
망할 년. 네가 누군지 알고 나보고 내 얘기를 쓰라는 거야.
처음 보는 그 여자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넘나들며 반강제적으로 그 노트를 내 손에 쥐어주고 갔다. 마음 같아서는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다.
여기 온 지 정확히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나에게 자꾸 뭘 시킨다. 귀찮게끔. 종이를 주면서 접으라고 하지 않나, 화분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지를 않나, 색연필을 주고서는 색을 칠해 보라고 하지를 않나, 더하기 빼기를 시키지 않나. 허 참! 내가 애도 아니고 뭣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하다 하다 이제는 무슨 말을 도대체 써보라는 건지.
부아가 치밀었지만, 혹시라도 노트에 무언가 적으면서 사라진 내 기억의 끝이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못 이기는 척 받아놓기는 했다. 내가 얼마 전에 옆방 영감하고 크게 싸운 뒤로 내 기억력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나는 배가 고팠다. 아무리 먹을 것을 찾아봐도 과자 부스러기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밥을 좀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을 나왔다.
얼마를 돌아다녔는지 더 허기가 져서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옆방 영감이 내 자리에 떡 하니 앉아서 홍시를 먹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내가 홍시가 있다는 것을 잊고서 지금까지 헛고생만 했구나 싶어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옆방 영감에게 내 홍시를 그만 먹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옆방 영감이 무슨 소리냐면 오히려 나에게 역정을 냈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는 이 홍시만은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홍시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한약방을 하셨는데, 가끔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 약방에 가면 할아버지는 ‘우리 준기 왔구나’라고 하시면서 약 서랍장 맨 위에 놓인 홍시를 병아리 안듯이 조심스레 쥐어 나에게 주셨다. 할아버지 한약방을 떠올리면 나에게는 한약냄새 보다 그 홍시 맛이 입안에 먼저 와닿는다.
그런데 옆방 영감이 그 홍시를 먹어치운 것이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옆방 영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그 홍시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운 내 홍시.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손을 잡아 뜯듯이 그 영감탱이 옷에서 떨어뜨려놨다. 내가 칠십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어이없고, 억울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방이 내 방이 아니란다. 내가 남의 방에 가서 난동을 부린 꼴이 되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 방이라는 곳으로 끌려 왔다.
나는 내 방이라는 곳이 너무 낯설었다. 커튼이 제대로 처지지 않아 눈이 부셨다. 내 침대도 없었고, 옷장이라고는 옷 몇 벌만 넣으면 가득 찰 것 같이 작았고, 내가 좋아하던 티테이블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얼마 만에 울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 일 이후에 나는 나의 모든 행동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기억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잘 모르겠고, 내가 밥을 언제 먹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며 모르는 여자가 무엇이든지 적어보라던 그 노트를 받아와서 낯선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무슨 말을 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노트가 옆에 있다는 것이 내 기억을 조금이나마 붙잡아둘 수는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기는 했다.
자기 전에 뭐라도 써볼까 싶어서 노트를 펴봤다. 벌써 첫 장에 누가 글을 하나 가득 써 놨다. 뭐라고 썼는지 많이도 써놨다. 돋보기를 찾아 쓰는 것도 귀찮아서 최대한 멀찍이 놓고 읽으려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두꺼운 노트 위로 나를 위로하려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 글자씩 읽다 보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덮어버렸다. 꼭 남의 것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써 놓은 것인지 궁금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나에게는 항상 큰 산 같았던 아버지.
아버지, 아니 아빠. 나 현정이. 아빠가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 현정이야.
아빠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본 게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 미안하네.
아빠는 오빠들에게는 무섭고 엄한 아빠였지만, 나에겐 항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였어.
엄마가 아끼던 화병을 내가 깼는데 아빠는 오빠들이 깬 줄 알고 오빠들을 심하게 혼냈잖아. 나중에 내가 깬 걸 알고도 아빠는 나를 야단을 치기는커녕 다치지 않았냐고 먼저 물었었지.
퇴근길에 군고구마를 사서 가슴에 품고 들어온 아빠는 항상 오빠들보다 나에게 먼저 줬잖아. 뜨거워서 못 먹을까 봐 후후 불어가면서 적당히 벗겨진 고구마 아래를 신문지로 돌돌 싸서 내 손에 쥐어줬어.
아빠, 기억나? 내가 7살 때였나.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한밤중에 아빠가 나만 데리고 뒷산에 올랐잖아. 눈이 많이 와서 발이 푹푹 빠지는데, 아빠가 나만 데리고 부엉이를 보러 간다고 해서 나는 무척 신이 났었어.
오빠들은 아빠 따라 몇 번이나 다녀왔는데 나는 그때가 처음이었어. 오빠들이 매번 나한테 자랑하듯이 으스대면서 떠들어대는 것이 너무 부러웠거든. 나도 아빠랑 몇 번이나 가고 싶었는데, 그날 본 부엉이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나는 다시는 부엉이를 보러 아빠를 따라나서지 않았지. 그것이 아빠와 나와 단둘이 무엇인가 했던 첫 번째 일이자, 마지막 일이었던 것 같아. 이제야 그것이 후회가 되네. 좀 더 많이 같이 다닐걸.
그래도 나에게 그날이 춥고 무섭기만 했던 것은 아니야.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날아와서 잡아챌 것 같은 그 부엉이를 보고 난 다음부터 나는 자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어.
그리고 그날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산길에서 나를 어깨에 올려 주었을 때 나는 그 산이 다 내 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어.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 그전에는 아빠가 나를 안아서 목마를 태우기만 하면 막 울었던 것 같은데.
산에 오를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아빠가 좀 야속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그 야속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어. 마치 내가 전쟁에서 싸우고 이겨서 돌아가는 개선장군이 된 기분이었거든.
아빠. 내 마음에는 그날의 기억이 예쁜 사진처럼 저장되어 있어. 아빠에게도 그날의 추억이 아직 살아남아 있기를 바래.
그날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는 아빠가 다시 그날의 듬직한 아빠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고개를 드네. 한겨울 추위 속에서 부엉이를 불러내던 용기 있고 당당한 우리 아빠.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는 더 늦기 전에 아빠와의 추억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 글을 쓰다 보면 아빠의 기억도 퍼즐 맞추듯이 맞춰지지 않을까 해서. 내 결혼식에 나를 기억하는 아빠와 들어가고 싶었는데. 미안해, 아빠. 내가 너무 늦게 시집가서.
시간이 많이 지났어.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아빠 머리는 하얗게 희었고, 힘 있던 두 다리가 균형 잡기 힘들어져 세 다리가 되었잖아.
아빠가 나 이제 결혼해.
아빠랑 이제 매일매일 같이 있을 수가 없어. 아빠를 끝까지 내가 돌보고 싶었는데 이게 아빠와 나를 위한 최선이래. 그래도 난 아빠를 이렇게 두고 가는 게 너무 미안해.
그래서 이 노트를 준비했어.
아빠가 시간을 보내기도 좋을 것 같아. 팔십 평생을 뒤돌아 보면 나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이고, 아빠가 꼭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많을 것 같아서. 또,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들도 있을 거 아냐.
아빠가 다 적어 놓으면 내가 꼭 아빠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게 해 줄게. 이 노트에 모두 적어줬으면 좋겠어.
아빠가 건강할 때, 십 년 전이라도 내가 결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서운하고, 아빠랑 같이 식장에 들어서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
아빠.
사랑해.
- 아빠의 사랑하는 막내딸 현정이가.
글을 읽고 나니 마음속에 불구덩이가 털썩 내려앉는 기분이다. 안타까운 건, 이 아가씨는 뭔가 착각을 하고 이 노트를 나에게 준 것 같다. 확실한 건 난 이 아가씨의 아빠가 아니다.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리 내가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내 딸을 못 알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부엉이를 보러 가던 날 내 딸은 무척 설레했다. 매번 오빠들만 데리고 간다고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는데, 그날은 자기 차례가 되었다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혼자서 옷까지 다 챙겨 입고 내가 나서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었다. 빨간 털모자를 쓰고, 빨간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목도리를 두르고, 하얀 장갑까지 끼고서는 신이 나서 나를 따라나섰다.
어린 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산에 오르면 소리를 내서도 안 되고, 추워도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춥고 무서웠을 텐데 나를 찾지도 않고 잘 따라 산에 올랐다.
나는 딸에게 한 겨울밤 경이롭게 보이는 부엉이를 보게 해 주고 싶었다. 큰 산짐승들이 대부분 겨울잠에 들어서 많이 위험하지 않은 겨울밤에 나는 주로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갔다. 부엉이 소리를 내면 부엉이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올 수도 있다는 작은 확률에 희망을 걸고 부엉이를 불러댔다. 꿈같이 부엉이 한 마리가 저 멀리 날아올라 우리 앞에 낮게 앉았다. 나는 그 부엉이가 행여 우리를 공격할까 봐 재빨리 손전등을 가져다 댔다. 이미 딸은 반쯤 넋이 나갔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기특한 딸을 안아주었다. 딸은 그새 훌쩍 자란 것 마냥 씩씩하게 자신의 그날 모험을 산에서 내려오는 내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다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내 딸의 모습을. 그래서 노트에 썼다.
나에게 노트를 준 아가씨에게.
남의 노트에 이렇게 글을 남겨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아가씨를 언제 만날지 몰라서 미리 적어 놓는 겁니다. 아가씨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떻게 아가씨가 우리 딸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지 신기합니다.
그런데 아가씨, 내 딸 이름은 미니입니다. 현정이가 아닙니다. 아가씨의 이 편지가 아가씨의 아버지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겠다던 이 노트를 아가씨가 억지로 주고 갔으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어쨌거나 나는 아가씨도 아가씨 아버지도 잘 모르지만, 아가씨 아버지가 이 노트를 받으면 좋아할 겁니다. 그러니 너무 아버지에게 미안해하지는 말고. 빨리 노트가 주인을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몇 자 적고 나니 나는 이 노트를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이 됐다. 그러면서도 내 딸은 대체 뭐 하고 있나 싶었다. 내심 서운했다. 안내 데스크에 가져다 놔야겠다.
방에서 나와 안내 데스크를 갔는데 사람이 없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안내 데스크 책상 위에 그냥 던져 놓고 왔다. 오늘은 그 노트 덕에 하루가 금방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