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세 넘은 딸이 70세 노모에게 드리는 선물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쯤이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원고지에 써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그 숙제를 받고 혼자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원고지에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할머니에게 숙제를 이야기했더니 할머니가 어느 아저씨와 비둘기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금은 그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데, 똥 이야기였던 것만은 기억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듣고 나서 숙제를 했다. 원고지에 쓴 것을 할머니께 읽어 드렸다. 할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가 있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때 우리 집에 사촌 언니가 놀러 왔는데, 할머니는 사촌 언니에게 직접 읽어주시면서 자랑을 했다. 나는 숙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쓴 그 글이 대단한 글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랫목에서 담요를 덮고 할머니 옆에 앉아서 느낀 그 따뜻한 그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착각을 하게 된 것이 말이다.
학창 시절 내내 글짓기 시간이 즐거웠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매번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어떤 상이라도 받았던 것이 나의 어깨를 한껏 더 올라가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꼭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열심히 써서 받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부끄럽다.
나의 사춘기도 글쓰기로 풀어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일기장에 내 속을 훤히 까발리고 후련함을 느꼈다. 까발린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나는 가감 없이, 앞뒤 없이 내 기분과 감정을 쏟아내고 일기장을 덮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일기장을 한 번도 다시 열어 본 적이 없다. 나의 민낯을 다시 대면할 용기가 없다. 또 친구와 함께 소설도 썼다. 서로의 희망사항을 적어 내려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우리는 홍콩배우를 좋아해서 그들과의 러브스토리를 서로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트에 꼭꼭 눌러쓴 그 이야기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다. 내 생각이 문자가 되면 나는 17세 소녀가 아니라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유명한 홍콩 배우의 여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결혼생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맞춤법도 틀린 그 소설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변 친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싶다. 무모함이었다.
나의 특별함이 결코 특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고1 국어시간이었다. 장래희망을 써내라고 했는데, ‘작가’라고 쓴 친구가 있었다. 그때 써낸 나의 장래희망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문과와 이과 사이에서 고민하는 학생이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사람이기보다 어느 학교 무슨 과를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단지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를 직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신선했다.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그것을 직업적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쓰는 즐거움만 알았지 읽는 즐거움을 통한 소통의 즐거움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친구가 국어 시간에 발표한 글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는 사생대회 혹은 반공이나 불조심 등의 주제에 따라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었다. 그때 내가 매번 글쓰기를 선택한 것은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의 글이 기억이 난다. 변기 위에 앉아서 자기 손톱을 바라보면서 쓴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고, 나는 그 친구와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의 꿈을 응원했었다.
경단녀가 되어 집안 살림에 아이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나를 가장 안타깝게 보는 사람이 있다. 엄마다. 엄마는 내가 독립운동이라도 하다가 그 일을 그만둔 것처럼 내 일을 크게 생각해 주고 내 능력을 대단하게 보는 것 같다. 그 시선이 고마우면서도 항상 숙제를 받는 학생처럼 부담스러웠다. 70세가 넘은 엄마가 40세가 넘은 딸의 직업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요즘 말로 웃프다. 엄마가 무심코 툭 던진 말이 “글을 써봐”였다. 뭐라도 해 보라는 심정으로 던진 말이다.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내게 수도 없이 던져졌다. 나는 이제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이다.
생각의 동굴을 더듬고 더듬어 들어갔더니 거기 할머니가 있었다. 내 글이 재미있다고 처음으로 칭찬해 준 사람이다. 할머니의 말과 미소가 정말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나 스스로를 믿고 살게 해 준 것 같다. ‘할머니,’ ‘사춘기,’ ‘글 잘 쓰던 우리 반 친구’에 대한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엄마’가 아닌 ‘박세미’로 살기를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다.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나에게 남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 엄마다. 나는 그녀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의 내 삶이 어쩔 수 없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꼭 이 사회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내려놓았다.
그런데 ‘글을 써봐’라고 던진 엄마의 한 마디가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하면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에서는 내가 무엇이라도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현관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생각해 보니, 퇴직하고 3년 정도 될 때까지는 내가 일할 자리가 있는데 지원해 보라고 하는 지인들의 연락이 가끔 있었다. 그때는 아이가 어려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런 연락은 끊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 이제 일해야지’라는 지인들의 연락에 ‘이제는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예요’라고 농담처럼 대답하는 나를 발견하며 스스로 놀랐다.
머리로만 글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지 말고 테스트받는 심정으로 동생이 5년 전에 알려준 ‘브런치’에 도전했다. 글을 올리려면 작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것만큼 확실히 나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작가가 되어서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 기뻤다. 아이도 남편도 아닌,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 10여 년 만인 것 같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엄마에게 알렸다. 엄마는 내가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했다. 카톡 보내는 것도 공부처럼 하는 엄마가 브런치에 가입을 했다. 그리고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빠짐없이 내 글을 읽으신다.
처음에 글을 올리면서 나의 목표는 막연했다. ‘5년 안에 제대로 된 것 하나만 쓰자’였다. 그러면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도 않을 것 같았고,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제대로 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저 가다 보면 그 길에 무언가를 만날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가 내 글을 재미있게 읽고서는 크게 웃으면서 “그래서, 백설기 실패했다는 거지?”라는 말을 했을 때, 나의 글을 쓰는 목표가 바뀌었다. 그 목표는 지금의 내 삶이 초라해서도 아니고, 앞으로의 삶에 내가 당당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엄마가 내 글을 통해서 내 소식을 듣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글을 쓰기로 했다. 차로 가면 40-50분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가 내 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한 달 혹은 두 달이 걸리는 거리가 된다. 딸과 엄마는 친구 같아서 자주 전화도 하고 속마음도 트면서 지낸다던데 나는 전화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속마음을 내비치는 것도 귀찮아하는 아들 같은 딸이다. 그런 내가 글로나마 엄마에게 나를 보여서 엄마를 웃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금 내 옆에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우리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가 아닌가 싶다.
엄마가 70세가 넘으니 두렵다. 그 자리가 비워질까 봐 그리고 그 빈자리가 너무나 그리워질 까 봐 두렵다. 지금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데, 어느 날 사라지면 나는 길을 잃은 아이가 될 것 같다. 할머니가 떠나시던 날 목 놓아 울던 내가 자꾸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