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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Nov 02. 2023

흔한 이름의 ‘코코’가 우리에게는 특별하다

우리의 ‘코코’

최현우 글, 이윤희 그림, 『코코에게』(창비, 2023)




‘코코!’

‘코코~’

‘코코?’



하루에도 수십 번 우리 집에서 실제로 불려지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도서관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책 표지에 신나게 달려가는 듯한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목줄을 잡고 함께 달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 아이와 우리 집 코코가 보이는 듯했다. 




제목과 표지만으로 선택한 그림책이었다. 



크고 검은 나무 뒤에 있는 아파트 창문 속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만큼 창문도 대부분 굳게 닫혀 있다. 어느 집 한 아이가 커튼을 걷어내고 어두운 표정으로 밖을 살며시 내다보고 있다. 



그 아이가 추운 겨울날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집을 나섰다. 



하얀 눈이 펄럭대며 내리는 거리를 지나다 아이는 까만 주차장 속에 낯선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아이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하주차장 버려진 상자 안에 조그마한 강아지가 자신이 여기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선뜻 그 강아지를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아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서 터덜터덜 놀이터까지 왔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그 아이를 찾아 따라왔다.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추운 겨울 자신을 찾아온 그 강아지를 빨간 목도리로 품어 주었다. 그리고 이름도 새로 만들어주었다. 그 강아지에게 이미 어떤 이름이 있었을 것이지만, 어두운 주차장 상자 안에 버려진 그 강아지에게 예전의 이름은 좋은 기억이 아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강아지에게 이미 상처가 난 그 이름을 지워내고, 새로운 이름으로 강아지에게 새로운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는 강아지의 이름을 쉬운 것으로 골랐다. 

‘코코’

아이는 코코가 이름처럼 코코의 마음이 쉽고 단순하게 편해지기를 바랐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도 코코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이름을 골랐다. 한 사람당 2개씩 원하는 이름을 지어서 카카오톡 게시판에 올렸다. 

‘숑이, 샤넬, 춘덕, 설백, 만세’ 그리고 ‘코코’ 



각자 두 표씩 원하는 이름에 투표를 했다. 그리고 ‘숑이, 코코, 만세’가 모두 두 표씩 나와 재투표를 통해 ‘코코’로 결정되었다. 코코는 남편이 지은 이름인데 비숑인 강아지가 프랑스 출신이라는 것에 가장 프랑스다운 이름을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풀 네임은 ‘코코 드 샤넬’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코코’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이는 ‘춘덕’이라는 이름이 정감이 있다며 하루종일 아쉬워했다. 강아지가 우리에게 오기도 전에 이름을 짓는 것만으로도 이미 강아지를 만난 것 같았다. 강아지 이름이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림책 속의 코코는 아이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자랐다. 아이와 코코는 붉은 줄로 연결되어 있다. 강아지 목줄이라고 하기에는 가늘어 보이는 그 줄이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인연 같기도 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교감 같기도 하다. 



코코는 아이가 웅크리고 있을 때면 산책을 하자며 따뜻하고 밝은 곳으로 아이를 끌어냈다. 아이가 코코에게 보여주던 그 주변의 모습을 이제 코코가 아이에게 새롭게 보여준다. 아이가 코코에게 보여준 관심만큼 코코도 아이를 혼자 두지 않았다. 코코는 항상 아이 곁에 있었다. 아이와 코코는 그렇게 함께하는 추억을 쌓아나갔다. 



이제 이들이 살던 동네가 철거되고, 집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왔다. 아이가 코코와의 추억이 배어 있는 물건과 코코를 함께 챙겨 집을 나왔다. 그 순간 아이와 코코가 연결된 그 빨간 줄이 놓쳐졌다. 



아이가 애타게 부른다. 

‘코코!’



다행히도 그 소리에 코코가 다시 아이를 향해 힘차게 달려왔다. 코코의 입에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 코코를 품어주었던 아이의 빨간 목도리가 물려 있다. 코코는 바람에 날아간 아이의 목도리를 주우러 갔던 것이다. 



아이는 ‘코코’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다정함을 느꼈고, 따뜻함이 아이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코코가 품에 안길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기뻤다.



나는 태어나서 강아지를 안아 본 적이 없었다. 코코가 우리 집에 오기까지는 말이다. 코코를 처음 건네받던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엉거주춤 코코를 안았다. 작은 솜뭉치 같았던 생명체가 내 품에서 꼬물거리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조심스러웠다. 



우리 집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강아지를 키워보자는 이야기를 아이와 남편과 함께 나눴다. 강아지를 키워보자는 것은 나로서는 새로운 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매일 학교는 어땠는지, 학원 숙제는 다 했는지, 혹은 밥 먹는 이야기로만 대화를 했던 우리 가족에게 강아지의 화두는 편안하게 대화의 폭을 넓혀주었다.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유기견 보호소와 펫샵이 함께 있는 곳을 용기 내어 방문했다. 그곳에서 강아지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우리가 유기견을 키울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처를 한 번 받은 강아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한 곳씩 펫샵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펫샵을 방문해서 어느 정도 머물다 보면, 우리에게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고, 펫샵에서 강아지를 분양받으면, 좀 더 쉽게 강아지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펫샵을 다니면 다닐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리창 안에 있는 강아지들이 누워 있으면, 힘없어 보여서 불쌍했고, 짖으면서 버둥거리면 ‘나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강아지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간에 내 마음이 구겨져 있다는 것은 이 일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몇 개의 펫샵을 둘러보면서 아이가 스스로 포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춘기 정서에 도움이 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할 때, 코코가 찾아왔다. 



아이 친구 엄마를 만나서 차를 한잔하는데, 그 집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는 분이 강아지를 분양해 주려는데 키워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엄마는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강아지를 키울 수가 없었다.  



나는 강아지의 사진을 보고, 관심을 보였지만, 강아지 주인은 자신이 아는 집에 강아지를 보내고 싶어 했다. 그래야 자신이 보고 싶을 때 연락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강아지를 엄청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에 그 아이 친구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강아지를 키울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게 나는 용기가 났다. 데려오고 싶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코코가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코코가 우리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코코가 없는 집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설거지할 때 발밑에 앉아 있고, 방문 앞에 기다리듯 앉아 있다.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열 때, 자신의 밥그릇을 만질 때, 어디서 그 소리를 듣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듯 행동하기도 하고, 혼내면 눈치를 보면서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밥도 잘 먹고, 변도 잘 보고, 잠도 잘 자는 코코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작은 생명체로 나에게 번거로움은 생겼다. 또 새로운 두려움도 생겼다. 



하지만 우리 집이 더 훈훈해지고 따뜻해졌다. 동시에 내 삶의 잠깐의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코코는 하루 중 단 몇 초만이라도 아니 단 몇 분만이라도 나를 멈추고 쉬게 하는 힘이 있다. 



코코가 우리 집에 오기 전 내가 받았던 그 사진을 다시 봤다. 두 장의 사진이었는데, 그때는 두 장 모두 코코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사진을 보니 한 장의 사진 속 강아지는 코코가 아니었다. 코코와 닮긴 했지만, 코코가 아니었다. 코코의 엄마였다. 



다른 사진은 코코가 뛰고 있는 모습이었다. 코코는 지금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달려든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사진을 찍기가 힘들다. 사진 속의 코코는 지금보다 더 작은 코코가 신이 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새삼 코코가 많이 자란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에 코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 담겨 있다는 것이 나에게도 코코와 함께 한 시간이 느껴졌다.



코코 엄마의 사진을 보고 난 뒤로, 난 코코에게 나를 부르는 말로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책임감은 더 크게 느껴졌다. 코코 엄마에게 ‘당신의 아들을 내가 잘 키워줄게요’라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코코에게’라는 나의 그림책을 만든다면, 나의 첫 장에는 코코 엄마의 모습을 넣고 싶다. 그 엄마의 마음으로 코코를 잘 키워서 마지막 장에는 잘 큰 코코가 신나게 뛰는 모습을 넣고 싶다.   



나는 반려동물과의 교감을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교감을 직접 느끼면서 나의 메말랐던 감정의 땅에 새싹이 빼꼼히 고개를 드는 것 같다. 생명이라는 것이 함께 할 때, 더 충만한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고맙다. 

우리의 ‘코코’야.




<우리 아이의 한 마디>

우리 코코와는 앞으로도 슬픈 추억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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