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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06. 2023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 ‘처음’의 설렘과 실패가 안겨준 ‘성장’
글/그림 홍우리, 『나의 첫 심부름』(키다리, 2022)
아이가 할머니의 그릇을 돌려드리러 할머니 댁에 가고 있다. 이것이 아이의 첫 심부름이다. 아이의 발걸음에 즐거움과 조심스러움이 묻어있다.
이 아이의 설렘에 나도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심부름이 떠올랐다. 유치원 다닐 때인지, 초등학교 막 입학해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은데 엄마가 나에게 콩나물 100원어치를 사 오라는 시킨 적이 있다. 혼자서 가게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떴고, 동생들은 할 수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큰 임무를 받은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집은 골목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집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게까지는 100m도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골목을 나와 조금 걷다가 사거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쉬운 길은 아니었다.
가게까지 가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던 같다. 하나는 ‘콩나물 주세요’라는 말을 잘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화가 시작되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게에 도착해서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었다. 콩나물 통이 가게 입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수도 없이 콩나물 달라는 말을 연습했는데, 나는 겨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콩나물 주세요’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콩나물 통을 가리켰다.
아줌마가 ‘얼마어치?’라고 물으시는데, 대답도 못하고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을 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지 손바닥에 쥔 100원이 잘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줌마가 직접 내 손에 있던 돈을 집었다. 아줌마는 콩나물 통을 칭칭 두르고 있던 천을 빼꼼히 거두고 콩나물을 쑥 뽑아내는데 그동안 내가 먹었던 콩나물이 그렇게 빳빳하고 길었나 싶은 것이 신기했다. 고깔 모양으로 접은 신문지에 아줌마는 쏙쏙 콩나물을 넣어주셨다. 축축한 신문지의 감촉이 별로 좋아 빠른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집에 갔다. 골목에 들어서서야 걱정스러운 심부름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동시에 내가 좀 의젓해진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도 나의 그런 기분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심부름을 잘하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할머니 댁 계단을 오르다가 아이가 그릇을 깨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소리에 아이의 심장은 개미만큼 작아졌고, 갑자기 새까만 걱정 구름이 몰려왔다.
아이는 당황한 마음에 그 상황을 모른 척하며 도망쳤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심부름을 하는 것도 심부름을 망친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일부러 그릇을 깬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릇이 깨진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실수일 뿐이었다. 아이가 그 실수를 자신의 잘못으로 자책하고 놀라서 도망치려는 모습이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 덕분에 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이가 도망간 곳에는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 나팔꽃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나팔 소리처럼 아이를 날카로운 말들로 비난했다.
나팔꽃들의 질책에 아이는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며 맨드라미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아이는 맨드라미처럼 붉은 분노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깨진 그릇으로 가장 속상한 사람은 아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이의 잘못이라고 몰아가자 그 속상함이 분노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가 장미꽃을 만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뾰족한 장미 가시가 아이의 마음에 콕콕 박혔다. 속상해진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해 아이는 눈물로 웅덩이가 만들어질 만큼 많이 울었다.
아이에게 꽂혀 있던 가시들이 그 눈물에 휩쓸려 빠지기 시작했다. 때로 눈물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불안, 부인, 분노, 타협, 우울과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두 씻겨 내주기도 한다.
웅덩이에서 더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앞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자신의 힘든 상황을 제대로 보고 털어내면,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때가 있다.
아이 앞에 있던 무지개로 아이는 용기를 얻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무지개 마음이 떠올랐다. 그 마음으로 자신의 눈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을 보고 아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일부러 그릇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자신의 실수를 돌아봤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릇이 깨지면서 위축되어 작아졌던 아이의 몸이 자라기 시작했다.
때마침 할머니가 집에 들어오셨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말씀드리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할머니께서는 오히려 아이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시고,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이와 할머니는 깨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붙였다. 금이 간 그릇이 새로운 그릇이 되었다. 음식을 담는 역할 대신 화분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그릇으로 다시 태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