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다양한 맛도 많지만, 나는 오리지널 초코파이가 좋고, 오리온에서 만든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먹었던 것과 가장 비슷하기 때문이다.
옛날 초코파이는 파란색 박스에 12개가 들어 있었고, 하나에 100원이었다. 하나씩 낱개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속이 다 보이는 투명한 비닐에 하얀색 무늬가 있었고, 양끝에는 금박 줄 같은 게 있었다. 내가 느끼는 크기는 지금보다 컸다. 하지만 요즘 초코파이가 예전 것보다 10% 커졌다고 한다.
초코파이는 우리 아빠가 퇴근길에 가끔 사 가지고 들어왔던 간식 중에 하나다. 아빠가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 오시면 우리 삼 남매는 아빠 앞에 쪼르르 앉았다. 그리고는 한 사람 당 초코파이를 세 개씩 받았다. 아빠는 상자 안에 또 다른 세 개를 남기면서, 이것은 엄마와 아빠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주지 않는 것이 아쉽기도 했고, 대체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두 개를 먹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나 나를 하나 더 주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었다.
나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은 각자 받은 초코파이 세 개를 자기 방식대로 먹었다. 나는 주로 그 자리에서 다 먹었던 것 같다. 특별히 어디에 숨겼던 기억이 없다. 여동생은 책상이나 책장 사이에 숨겨 두었다. 나중에 먹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뺏기기 일쑤였다. 남동생은 세 개를 받아 나오자마자 자기가 하나 먹고, 나머지 두 개는 누나들에게 맡겼던 것 같다.
아빠는 우리가 초코파이 때문에 싸울까 봐 세 개씩 공평하게 나눠주신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싸웠을까 싶지만, 그때는 하나를 더 먹고, 덜 먹고 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서로 아빠가 남긴 초코파이 세 개가 다른 형제에게 갈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었다.
우리가 아웅다웅 싸우면, 아빠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그래 봐야, 이 세상에 딱 너희 셋이다.” 이 말이 30년도 더 지난 이제야 마음에 닿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싸우고, 저녁에는 같이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다음날 또 싸우고, 화해도 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형제는 나이 차이가 두 살 터울씩 지는데, 크면서 서로 많이 싸웠다. 그래서 엄마한테 셋 다 많이 혼이 났던 기억이 많다. 싸운 이유는 천만 가지도 넘어서 일일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 컸다. 형제가 셋이다 보니, 2대 1로 싸우는 일이 많았다. 하루에도 열댓 번 싸우니까 편은 자꾸 바뀌었다.
남동생은 중학생쯤 되어 사춘기가 오면서 나랑 여동생과는 별로 싸우지 않았다. 그냥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반면, 나랑 여동생은 사춘기가 오면서 격렬하게 더 싸웠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싸우고 나서 내 여동생이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언니, 미안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 동생이 남인 것 같아서 어색하고 낯설었었다.
우리가 초코파이로 싸우면서 지냈던 시절에 우리 가족은 파란색 기와가 올려진 한옥 집에 살았다. 그 한옥 집은 천방지축 천둥벌거숭이 같은 우리 삼 남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지금은 아마도 사라졌을 그 한옥 집이 초코파이를 보면 내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그 집에서 내가 살았을 때도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흐린 날도 있었는데, 나는 그 집을 생각하면 항상 햇살이 눈부시고 따뜻하게 내리쬐던 날의 마루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마루에는 우리 삼 남매의 유년시절이 모두 녹아 있다.
한옥 집 마당에는 수돗가와 화단이 있었다. 그곳 담벼락을 타고 나팔꽃이 올라가고 있었고, 가지가 앙상한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아빠랑 여름에 산에 갔다가 잡아온 매미를 실에 묶어 그 나무에 매달아 놓았었다. 매미는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매미가 울지 않고 번데기처럼 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안쓰러웠었다. 괜히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었다. 화단 앞쪽으로는 봉숭아와 '사루비아'가 있었다.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면 꽃잎과 잎을 백반과 같이 빻아서 손톱에 물을 들였다. 손에 실로 꽁꽁 묶고 잘 때는 답답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손톱뿐 아니라 손까지 봉숭아가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면 뿌듯했다. '사루비아'는 꽃을 따서 그 뒤를 쪽 빨면 단물이 나와서 그 재미로 꽃을 다 땄었다. 단물이 너무 적게 나오는 것이 항상 불만스러웠었다.
마당 수도와 옥상 올라가는 계단에 내 검정 고무줄이 24시간 매여져 있었는데, 엄마가 밤에 그 고무줄에 몇 번 걸려서 나는 혼이 나기도 했었다. 수돗가 옆으로 광이 있었다. 그 광에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빨간색 ‘스카이 콩콩’이 감금되어 있던 적이 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가 우리 집 마당에서 함께 ‘스카이 콩콩’을 탔는데, 마당이 쫙 갈라져 버렸다. 엄마는 화가 나서 내 ‘스카이 콩콩’을 광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그때 ‘스카이 콩콩’ 타는 재미에 빠진 내게는 너무 큰 벌이었다.
해가 질 무렵, 5시가 되면 애국가가 나왔다. 길 가던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멈추어 서 있어야 했다. 대문 밖의 세상은 ‘이상의 나라의 폴’처럼 모두가 멈췄지만,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삼 남매를 한 줄로 세우고 한 명씩 씻기셨다. 동네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 삼 남매는 씻고 난 뒤 만화영화를 보면서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9시에 뉴스 시그널이 울리면서 ‘어린이가 잘 시간’이라는 음성이 나오면, 우리는 셋이 같은 이불을 펴고 누워서 함께 잤다. 잠이 안 와서 셋이 이불속에서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을 올라가면서 우리는 그 한옥 집을 떠났다. 그 집에서 이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더 이상 초코파이 세 개 때문에 싸우지도 않았고, 같이 씻고 함께 만화 영화를 보면서 밥을 먹지도 않았다. 그리고 셋이 같은 이불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다. 우리는 각자 자기 방에서 각자의 꿈을 꾸고 지냈다. 어느새 우리는 각자 자기 집에서 서로 다른 일상을 지낸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있어야 서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아빠 말대로 ‘이 세상에 그래 봤자, 딱 셋’인데 말이다. 내가 친구들과 나누는 일상도 내 동생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데, 살다 보니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는 순간이 있다. 좋고 나쁜 것의 문제가 아니라, 아쉬운 일이다.
아쉽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예전처럼 격의 없이 지낸다는 것은 각자의 가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자란 그 우애라는 것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잊고 지냈던 보험같이 힘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긴 설명 없이, 변명 없이 나의 힘든 마음을 내려놔도 별다른 말없이 받아주고 울어주는 것이 그 우애라는 것인 것 같다. 한옥 집에 담긴 치열했던 세 개의 초코파이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추억의 힘이 오늘의 힘든 우리를 서로 격려하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