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에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우편함을 보면 설레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 우편함은 나에게 쓸데없는 홍보물이나 돈을 내라는 고지서가 꽂혀 있는 사물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저기 꽂혀 있는 저 편지에도 나에게 돈 한 번 써보라고 이야기하거나, 내가 사용한 것들에 대해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쓰여 있다고 추측하고 대수롭지 않게 편지를 꺼냈다.
일단 편지를 꺼내 들고는 수신자 이름부터 확인했다. 우리 집에 전에 살던 사람들 앞으로 오는 편지가 종종 있었다. 수신자 이름을 확인하려는데, 그 옆에 빨간색으로 ‘무상수리통지’라는 글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빨간색 글씨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동생이 수술하는 동안 동생 이름 옆에 떠 있는 ‘수술 중’이라는 빨간색이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강렬하게 경고를 주는듯한 빨간색 글자는 내 차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편지를 열어 보니, 자동차 회사에서 내 자동차의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료라고는 것이 의심을 갖게 했지만, 대기업에서 고객 유지를 위해 하는 서비스라면 이것은 진짜 공짜가 맞을 것 같았다. 서비스 매뉴얼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요즘 주식시장에서 보여준 빨간색 이후에 나를 미소 짓게 하는 빨간색이었다.
고객 통지문에는 대상, 조치내용, 보상 혜택, 인센티브 프로그램, 평생 보증 혜택, 기타, 추가 안내사항이라는 조항이 설정되어 있었다. 각 조항별로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어서 나는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었다. 더욱이 무상이라는데 내가 이것저것 더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받을 수 있는 공짜 서비스의 수준을 내가 정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이어도 바꿀 때가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바꾸면 공짜로 서비스받는 것이 덜 미안하기도 할 것 같았다. ‘무상’라는 말은 나에게 어떤 결정권이나 권리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통지서를 접어 봉투에 넣으려고 하는데 ‘평생 보증 혜택’이라는 조항이 눈에 띄었다. 무상이라는 것도 반가운데 ‘평생’이라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평생 보증 혜택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이번에 보상받은 이후에 이것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한해서 회사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차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는 혜택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손을 댄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책임지겠지만, 내가 관리를 잘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에는 책임이 따른다.
남편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도 문제없이 지냈는데 번거롭게 서비스센터를 찾아가서 무상 서비스를 받을 필요가 있냐고 나에게 반문하였다. ‘무상수리’라는 말 중에 남편은 ‘수리’에 무게를 두었고, 나는 ‘무상’에 무게를 두었다. 나는 당연히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겪더라도 그 서비스를 무료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무상’이라는 말에 더 무게를 두었을까. 이 세상에 공짜는 없기 때문이다. 공짜인 줄 알았는데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미 비용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 많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용은 비단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신적, 사회적, 감정적 등 다양한 면에서 지불해야 하는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나는 나이가 들고 있다. 공짜로 나이가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만큼 세상에 지불한 비용이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가족과 친구를 통해 희로애락을 배우면서 내가 성장했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친정과 친구를 뿌리로 삼고, 시댁, 남편, 아이 등을 통해 새로운 세상 속에서 내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때로는 내게 벅찬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본전 생각만 나지 않아도 성공적인 지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차 앞으로 온 무상수리통지서가 내 앞으로 온 것이었으면 어땠을 지에 대한 재미있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 든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헤매고 있다. 내가 수리를 받아서 더 괜찮은 나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말이다. 얼굴에 있는 기미 잡티도 다 사라지고, 살도 빠지는 외모 업그레이드에서부터 어떤 일에든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위기 대처 능력 업그레이드, 가족이나 친구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는 눈치 업그레이드, 운동장을 몇 바퀴 뛸 수 있는 체력 업그레이드, 내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경제력 업그레이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여유 업그레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 상상만으로도 나의 즐거움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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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45세가 되었으므로, 올해는 외모 업그레이드와 체력 업그레이드를 무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서비스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3년 동안 당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