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앞뒤 없이 사람들과 나누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우리 아버지도 베트남전에 다녀왔다고 흐릿하게 내뱉었다.
“저희 아버지도 베트남전 갔다 오셨는데요.”
“국가보훈처에 신청하셨어요?”
“네?”
“베트남전 갔다 오신 분들은 나중에 국립묘지에 안장이 되거든요.”
나는 그동안 아버지가 그 전쟁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아야 되는지, 아버지에게 그 전쟁은 어떤 의미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전쟁터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내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 온 거 마냥 남들과의 대화 한가운데 아버지의 참전 사실을 가볍게 툭 던져 놓았다.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베트남 전쟁에 참전 사실에 나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현대사는 책에서 보던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역사 속에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나에게 아버지의 인생은 내가 태어나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그 이전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청춘에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1 공화국부터 1987년 당시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정치사를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특히, 1979년 10. 26. 사태를 설명하면서 김재규의 성대모사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버지가 그 역사를 겪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청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로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이제는 더 늦어지기 전에 그 관심을 기록으로서 남겨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드릴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48개 질문으로 1차 질문지를 만들었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를 통해 그 시대를 보는 것으로 질문을 만들어 갔다. 그런데 질문지를 만들면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아버지를 만나 보고 싶어 졌다. 이것이 내 아버지의 가장 젊은 시절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20대의 ‘나의 아버지’가 궁금해졌다.
질문지를 들고서 부모님 댁에 가면서 ‘이것을 어떻게 건넬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빠, 여기 이 노트에 답변을 써줘. 아빠가 이야기해 주는 것을 내가 다 받아 적는 것보다, 아빠가 쓰면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질문지로 만들어 왔어. 내가 베트남 전쟁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전쟁에 참전한 사람으로서 책에는 없는 생생한 전쟁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잖아. 그때 아빠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고. 아빠가 가장 힘이 있고, 무서운 것 없는 시절이었을 거잖아. 아빠가 그 전쟁터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궁금해. 아빠의 청춘이 보고 싶어.’
나는 아버지에게 노트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니 그 노트를 꺼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 노트를 꺼내서 아버지께 드리면서 질문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질문지가 끼워진 노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빠……. 이거 시간 될 때 봐봐. 이거 여기에 줄대로 안 맞춰 써도 돼. 시간 될 때, 그때 해 주면 돼.”
나는 질문지와 노트만 만지작거리면서 아버지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 역시 나에게 별다르게 묻지 않으셨다. 정확하고 꼼꼼한 아버지의 성격으로는 질문만 백 개는 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냥 웃으면서 알았다고만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정말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아버지께 확인받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 무슨 설명이든지 그럴듯하게 해야 제대로 쓰실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질문지와 노트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 글이 정기적으로 실리는 지역신문만 날짜별로 정리해 놓고 가라고 하셨다. 내가 쓴 칼럼이 실린 지역신문을 신문사에서 나에게 우편으로 보내준다. 나는 인터넷으로 보면 되기 때문에 굳이 우편으로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이 종이로 된 그 신문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것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빠짐없이 모아놓고 읽으신다. 그 정성이 고마우면서도 그날 나는 아버지가 그 신문만 챙기시는 게 못내 서운했다. 나에게는 그 지역신문보다 내가 당신을 생각하면서 만든 질문지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댁에서 돌아오면서 아버지 앞에서 그 노트를 꺼내는 것을 왜 그토록 주저했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 노트를 드리면서 울컥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도 몰랐던 숨겨진 내 마음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것은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가 듣기 싫어도 꾸역꾸역 앉아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그때가 앞으로 나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나를 앉혀 놓고 성대모사까지 해 가며 역사를 이야기해 주지 않으신다.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별일 없지?’로 시작해서 ‘알았어’로 끝이 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아버지의 청춘을 궁금해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은 두 가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하나는 아버지와 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살아있는 대화의 소재가 베트남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나만의 방식인 것 같다. 한국의 정치사를 이야기해 주시던 그 모습이 베트남 전쟁 이야기에 겹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 있고, 그것을 아버지의 필체로 간직하고 싶은 바람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칠순 때,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찍고 나서, 부모님만 따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까지 갖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집에 가려고 짐을 정리하는데, 어색한 공기가 주변을 눌렀다. 부모님이 사진사에게 무엇인가 부탁하시더니 아버지부터 증명사진을 찍듯이 사진을 찍으셨다. '무슨 사진을 또 찍느냐'는 나의 퉁명스러운 말이 땅에 닿기도 전에 사진사가 말했다. “장수사진을 찍어 놓으면 오래 사세요.” 장수사진이라는 말에 나는 대응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장수사진을 찍는 부모님을 보는데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장수 사진을 미리 찍어 놓으면 장수한다지만, 그 사진을 찍는 부모님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부모님이 우리와 헤어지려는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정확한 날은 모르지만, 부모님이 이제 준비해야 되는 시간은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초등학교 5학년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떠날 수 있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청춘을 품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