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차가운 바람이 맴돌던 담임 선생님이 제일 낯설었다. 키도 크고 세련된 외모의 선생님은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자주 혼내셨다. 한 달에 두 번 수학 성적에 따라 자리를 배정해 주셨다. 우수한 성적 순서로 1번, 3번, 4번, 2번이 한 조가 되어 1번과 2번, 3번과 4번이 짝꿍이 되고, 1번이 조장, 3번이 부조장이 되었다.
키가 작던 나는 항상 앞에 줄을 오고 갔다. 다행히도 나는 1번 자리에 매번 앉아서 선생님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조장은 조의 대표로서 여러 가지 일을 했야만 했다. 업무 수첩 같은 조장 수첩에 매일 많은 것들을 체크했다. 매일 긴장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 매일 아침 자기 조원들이 리코더를 가지고 왔는지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매일 리코더를 가르쳐주셨고, 연습하도록 하셨다. 그때는 선생님께서 리코더를 매우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것이 선생님의 전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차가운 교실에서 낯설었던 것들이 차츰차츰 원래 내 것이었던 것 마냥 익숙해졌다. 친구 덕분이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정육점이 있었는데 그 집 아이였다. 나보다 키는 약간 더 크고 얄상한 얼굴에 안경을 썼고, 이목구비가 예쁜 친구였다. 그 친구는 항상 웃는 얼굴에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매일매일 그 친구는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놀았다.
그 친구는 나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이 친구의 첫인상은 내가 주로 쓰던 동그란 연필이 아니라 그 친구의 각진 네모 연필 끝에 무언가로 힘껏 눌려 찍혀 있던 그 친구의 이름만큼 새로웠다. 그때, 그 친구의 이름이 내 마음에도 새겨졌다. 그 친구는 차분하고 조심성 있고, 정리 정돈도 잘하고, 깔끔하고, 말수도 적었던 아이였다. 수다스러운 내 모습에 그저 웃기만 했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야리야리한 아이였다. 그 친구가 온실 밖으로 나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홍콩 영화를 좋아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홍콩 영화가 인기가 있었다. 우리도 그 무리에 끼여 주말이면 그 친구 집에서 홍콩 영화 비디오를 보았다. 나는 장국영을 좋아했고, 친구는 유덕화를 좋아했다. 그 친구는 유덕화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찾아보았다. 특히, 천장지구라는 영화를 수십 번 보았고, 중국어 노래 가사를 소리만 듣고 그것을 한글로 받아 적어 외웠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열정만으로 외워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영화 대사를 듣고 있는 그 친구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짝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장국영, 유덕화, 주윤발 등 홍콩 배우들이 내한을 하기도 했고,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했고, 그들의 영화가 극장마다 걸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그 문화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특별함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한때 스쳐가는 사춘기 소녀의 시간이라는 어른들의 반응에 파르르 떨면서 그 잔소리에 맞짱 뜨려 했던 우리였다. 홍콩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시선에 대해 우리만의 온갖 이유를 들이대면서 홍콩 영화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찬양하던 시기였다.
영화를 보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홍콩 배우들과 우리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함께 써 보기도 했다. 풋풋한 나의 십 대를 만나본다는 셀렘보다 틀린 맞춤법과 마구잡이식 이야기 전개가 먼저 보일 것 같아 지금은 그 이야기를 다시 펼쳐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전화로 한두 시간씩 떠들고 나서 ‘그래, 그럼 빨간 집 앞에서 보자!’라면서 전화를 끊었던 우리였다. 그 친구와 우리 집 사이 중간지점에 우체국이 있었다. 그곳을 우리는 ‘빨간 집’이라고 불렀다. 만나서 특별한 것 없이 동네를 몇 바퀴씩 돌면서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가 어학연수를 떠날 때도 우리는 그곳에서 헤어졌고, 어학연수를 다녀와 세상이 더 넓고 볼 것이 많다며 같이 유학을 가자고 이야기했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실제로 새로운 꿈을 갖고 유학을 떠났었다. 그때 친구를 배웅했던 곳도 그곳이었다.
유학을 가서 그 친구는 남편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 남편을 결혼식 하기 며칠 전에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그 남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그 친구 남편을 만나게 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번째는 유학 중에 있던 친구를 내가 찾아갔을 때, 친구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남편을 본 적이 있다. 친구가 우리보다 앞서 걷던 어떤 남자를 가리키며 자기와 같은 학교 다니는데, 조폭처럼 생기지 않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우리끼리 낄낄거리면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 남자가 듣고, 다음날 학교에서 내 친구를 찾아와 조폭 마누라가 되어 보지 않겠냐며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되었다.
유덕화를 좋아하던 그 친구의 남편은 내가 상상으로 그렸던 내 친구의 남편 외모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친구가 선택한 사람이라서 그냥 처음부터 좋았다.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남편이 어떤 사람인 것 같은지 내 생각을 물었던 적이 있다. 지하철 안에서 친구와 나란히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얼굴에 닿아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는데, 혹시 이 표정을 답으로 생각할까 봐 ‘좋은 사람인 것 같아’라고 서둘러 대답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겪어 보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내 친구가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나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친구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나보다 앞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 친구는 다시 온실로 들어갔다. 운전면허만 따는 것보다 자동차를 다 공부해서 고장이 나면 수리하고 싶다고 했었고, 명품 핸드백보다 투박한 카메라 가방을 더 좋아했던 친구가 딸을 키우면서 다시 소녀의 감성을 품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이름이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엄마’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는 온실 속에서 자신이 자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실 속에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들어갔다. 더 세심하게 정성을 들이면서 엄마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 내 친구에게 이전의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은 찾기가 어려워졌다.
아침에 말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던 그 친구는 아침부터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집안에서 기름 냄새나는 것을 못 견뎌하던 그 친구는 아이의 아침밥으로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해서 챙겨 먹이려고 했다. 20년 이상 음력 생일을 챙기던 그 친구는 남편과 아이와는 양력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음력 생일을 챙기는 수고로움을 덜어준 것이다.
대학 때 사진 동아리를 하던 친구는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서 유학 가서도 혼자서 극장에서 몇 편씩 영화를 보던 그 친구는 영화관에 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다. 엄마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나에게 이 친구는 연필에 새긴 그녀의 이름처럼 내겐 그 이름 석자로 다가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로 발을 동동 구르며 사는 그 친구의 모습이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게 먼저 다가온다.
이제 우리는 전화 한 통 편하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시간을 내서 하는 전화 한 통에도 서로가 아이와 시댁, 남편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다. 이제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가정이 되어 늘어놓는 한숨 소리가 커졌다.
나보다 먼저 결혼하고 육아를 경험하는 친구가 먼저 시작한 엄마의 자리에서 겪는 진통을 나도 몇 년이 지나면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나보다 그 친구가 낯선 세계에 먼저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친구가 가정생활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겪고 있을 때 나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대답만 내놓는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게 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정답은 나보다 그 친구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몰라서 친구를 찾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그리고 앞뒤 없이 엉망진창으로 드러내 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아도 그 감정을 그대로 들여다 봐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이 친구가 소중한 이유가 무조건 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저지르는 모든 일을 이해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 친구가 소중한 이유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친구의 모든 것이 저절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 친구의 기쁜 것을 함께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거운 짐도 진심으로 기꺼이 나눠들 수 있게 되었다. 인디언들에게 친구란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친구와 나는 지금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는지, 웃는지, 화가 났는지 하는 것들이 금방 내 눈에 다 보여서 알 수 있었고,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등을 보고 서 있는 것 같다. 그 등에 지워진 짐이 먼저 보이고, 어깨의 떨림이 다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서로 숨죽여서 눈치 보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먼저 뒤돌아 울어 버리는 일도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소리 없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토닥이기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등인데도 표정이 다 보인다.
부모와 형제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지만, 친구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고, 나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가운 5학년 7반 교실에서 내가 제자리를 찾아가게 도와준 친구는 지금 어디서 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반면,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이 친구와는 평생을 이렇게 함께 가고 있다.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관계이다.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데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시간에 따라 변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나이가 들면서는 서로의 인생 모습이 점점 더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억지로 이해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나 또한 변한 모습으로 친구 옆에 있겠지만 그래도 온기만 전해지면 친구는 스스로 자신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피곤을 씻어내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하루를 살기를 바란다. ‘엄마’라는 말이 자녀와 나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지만, 그 중심에는 자녀가 아니라 내가 먼저 서 있다는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