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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Mar 06. 2023

상대에 맞는 언어 사용

: 오리는 ‘꽥꽥!’

동생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줬다.

1분 정도 되는 영상 속에는 세 살짜리 조카가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부르고 있었다.





여유 있게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오리를 보면서 아이가 큰 소리로 ‘오리야~오리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오리는 그 다정한 외침이 무색하게 두 마리씩 팀을 이뤄 동서로 갈라졌다. 삐죽이 보이는 푸른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그 따뜻한 소리도 흩어져 날아가는 듯 했다. 메마른 풀더미와 차가운 돌덩이도 그 애절한 소리를 품어주지 않았다.



자기의 외침에 반응 없는 오리들의 모습을 본 아이는 10여 초 정도 멈추었다. 그러더니 무엇인가 결심하듯이 다시 크게 오리를 불렀다.



‘꽥!꽥!’ ‘꽥!꽥!’



‘오리야~’라고 불렀을 때 보다 많은 시간을 ‘꽥!꽥!’이라고 불렀다.



동서로 팀을 이뤄서 흩어졌던 오리 4마리가 다시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어느 순간 한자리에 모여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아이는 자기에게 오지 않는 오리가 다소 원망스러운 듯 한 마디 툭 던지고 돌아섰다.



‘꽥!꽥!’



그 말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잘 지내라’는 말인지 ‘너희 너무 한다’라는 말인지 ‘다음에 보자’라는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돌아서는 모습에서 지금 오리가 자기에게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체념하면서 돌아서는 것 같았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다소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표정이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 대견한 모습 속에 있는 천진난만한 세 살짜리의 언어에서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항상 나의 언어로만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언어에 맞춰 나의 생각을 전달할만한 여유도 생각의 전환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나의 언어로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만 몰입하고,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것에 답답해 했던 것 같다.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해서 영어 쓰는 사람과 일본어 쓰는 사람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했어도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남편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말이 통해서였다. 연애 시절의 남편은 나의 사소한 말도 흘려듣지 않았고, 내가 1절을 하면 2절, 3절까지 다 예상한 듯 대꾸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 시절 한 번도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싸우지 않았던 것은 싸울 일이 없을 만큼 서로의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말이 통해서는 아니었다.



결혼해서 1년도 되지 않아서 나는 이런 큰 깨달음을 금방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남편은 나의 사소한 말도 흘려듣지 않고, 내가 하는 1절에 2절, 3절까지 다 예상하고 있지만, 그것의 해석은 나와는 너무 다르다. 이제 우리는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 생활 부분이 각자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남편에게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내 말이 들어갈 만한 단 하나의 틈도 없을 때가 있다. 그 사람도 나에게 자기 책임에 대한 입장을 말할 수 많은 말들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15여년 전 결혼하고 처음 싸운 부부싸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 싸웠는지는 이유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의 심리는 또렷이 지금도 내 마음에 얼룩져 있다. 그때 싸우면서 나는 교양있고, 똑똑한 척 이야기하려고 했다.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표현하려고 했었다. 마치 회의 석상에서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온갖 현학적인 표현, 차분한 말투 그리고 돌려 말하는 기술까지 선보이면서 나의 의견을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남편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에 분개한 나는 서재에 이부자리를 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남편에게 내 의견을 말할 때는 웃으면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 웃음을 때때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제는 다소 있지만, 이제는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하면 서로가 다시 일상 속에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웃음으로 서로 잘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나마 남편은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맞추어 나가면서 서로의 언어를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외의 관계에서 나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많이 헤매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지낸 사람들과 서로의 생활이 많이 달라지면서 그들의 언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고, 전혀 다른 생활 속에서의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언어에 적응하지 못할 때도 많다.



세 살짜리 조카가 오리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소통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먼저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다. 나의 언어가 그 사람의 언어와 같을 것이라는 기대는 내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는 편리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소통은 내 생각을 뱉어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서로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세 살짜리의 모습에서 잊고 지냈던 혹은 무시하며 지내왔던 내 생각의 한 끄트머리를 잡아내 봤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jkB6cZ34-4PlVs1KnsslgA==?uid=4f8c6c5e6d91434c8dde0827240053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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