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과 불공평 완화
"비혼은 함께 잘 살살기 위한 고민에 바탕을 둔 적극적 실천이다."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면 취업을 한다. 종종 연애도 하다가 서른 언저리 즈음엔 결혼을 계획하게 된다. 결혼을 하면 출산과 육아 등의 과정이 뒤따른다. 우린 이 과정에 이유를 묻지 않는다. '학교 왜 다녀?' '연애는 왜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정형화된 일련의 과정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겐 질문이 따라붙는다. '대학은 왜 안 가려고?' '연애를 왜 안 하는 거야?' 그리고 결혼을 안 할 거란 말은 치기 어린 우스갯소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혼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는다기보다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맥락 위에 서 있다. 결혼에 내재한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적극적 실천인 셈이다. 때가 되면 다 알 거라는 말을 비웃고자 오늘도 '비혼식'이 거행된다. 비혼은 무엇을 하지 않는 수동적 회피라기보다 그 자체로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결혼은 불평등을 기저에 깔고 있다. 즉, 결혼은 위계에 기반한 고정된 성역할 재생산에 기여한다. 결혼식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다르다. 부모가 다 있다는 전제 하에 하객들에게 편지를 읽는 역할은 아버지가 담당한다. 그것도 신랑 측 아버지가 주로 맡는다. 결혼 생활에선 가부장제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미디어에서는 여성이 가장처럼 보이는 가족 관계를 예외적인 것처럼 다룬다. 지난 5월부터 방영 중인 JTBC <1호가 될 순 없어>에선 다양한 관계의 부부가 등장한다. 이지혜-박준형 부부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지혜가 가족 내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이 자주 비친다. 그 모습을 보며 스튜디오 내 패널들은 웃고 떠든다. 가부장제와는 조금 다른 형태가 자주 노출되는 측면은 긍정적일 수 있으나 개별적인 사례로서 웃음을 자아내는 용도라면 방식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교과서에서 설거지하는 여성, TV보고 있는 남성의 사진이 조금씩 바뀌는 수준에 변화가 머물러선 안 되는 이유다. 비혼은 계속해서 결혼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위와 같은 성역할에 따른 불평등에 수긍하지 않고 점진적 개선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혼은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다. 애초에 법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결혼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이 많다. 성소수자가 계약 결혼을 감행하는 이유다. '가족(세대)' 단위의 정책은 세제 혜택부터 대출 금리 등 다양하다. 심지어 핸드폰 요금도 가족끼리 묶으면 더 할인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법적으로 '가족'은 결혼한 부부를 기본 조건으로 삼고 그 법은 이성 간 결혼만을 허용한다. 꼭 성소수자만이 아니더라도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성격이나 연애관 등에 따라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혼을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럼 '해명'할 의무가 없음에도 질문에 시달려야야 한다. 2년 전 성소수자 공동체 무지개집에선 성소수자 아닌 사람을 입주자로 들인 적이 있다. 바로 40대 비혼 여성이다. 입주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40대 비혼 여성도 사회에서 퀴어나 마찬가지란 의견에 대부분 공감했기 때문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적당한 말을 건네며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결혼이란 제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필수화돼있다. 비혼은 결혼도 선택 사항이 될 수 있다는 대항적 의미를 지닌다.
비혼은 결혼을 하는 사람을 포함한 모두에게 이롭다. 가족 구성원이 보다 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할 수록 돕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혼은 결혼 제도에 소외된 사람들이 겪는 실질적 피해를 주목하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결혼에 대한 부담감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바뀌는 데 기여한다. 무엇보다 비혼은 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수와 정상성을 연관짓는 관점에 균열을 내는 저항적 흐름에 함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혼을 '선언'한다. 비혼이라는 행위를 알림으로써 결혼 문화를 둘러싼 부당함을 완화하기 위함이다. 혼자만 알기엔 너무나 소중한 비혼이다.